“엄마,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 2월까지 피카소의 조각품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어요. 일생에 한 번 있는 기회라니까 시간 되면 가 보세요.” 뉴욕 살았던 아들의 소리다. 아들 앞에서 무식한 어미란 소릴 듣고 싶진 않다. 이왕 사는데 문화인 흉내 내며 살아 나쁠 것 없지, 싶어 친구들 몇 꼬셔 룰루랄라 웃으며 떠들며 잡담하며 노년(?) 수학여행 기분으로 뉴욕행을 했다.
솔직히 고백컨대 난 그리 예술에 조예가 깊은 인간은 아니다. 특히 현대 그림은 더더욱 이해도 감상도 할 줄 모른다. 눈이 귀에 붙은 것 같고 귀는 배꼽 자리에 있는듯 하면 어찌 봐야 좋은지 몰라 당황한다. 그래도 심각한 얼굴로 감상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이마에 주름 잡고 아는 척 피카소의 조각들을 구경했다.
피카소 위층에는 예전처럼 주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 피카소 보며 주눅 들었던 마음이 인상파 그림들을 보면서 조금 누그러든다. 내 주제에 다다이즘, 도도이즘 해 봤자 쇠귀에 경 읽기지…, 하면서. 암, 그렇지, 그렇지. 그래도 반 고흐의 그림처럼 나무는 나무처럼, 별은 별처럼 보여야지…, 하면서.
그러다 한 그림 앞에 발이 딱 들러붙어버렸다. 헨리 루쏘의 “잠든 집시!” 전에도 이 그림 여러 번 보긴 했다. 아들 내외가 뉴욕 살 때 모마까지 걸어가기가 딱 좋은 거리여서 운동 삼아 가서는 문화인 냄새 피워 보려 들었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 때는 그 그림 앞에서 잘해야 30초나 서 있었을까? 그런데 이번엔 아니다. 내 발이 그 자리에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그뿐이면 좋겠는데 그도 아니다. 어쩌자고 눈에서 웬 물이 그렇게 쏟아져 내리는지…. 모두 나처럼 그림을 향해 같은 방향을 하고 서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예쁘다거나 매력 있는 여자라 보기는 쉽지 않은 흑인 집시 여인이 옆에 만돌린을 놓고 잠이 들었다. 만돌린 옆에는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물병 하나. 살기 위해 노래하고 춤추다 고달픈 몸을 눕힌 여인. 그녀의 몸과 마음 위한 살림살이가 어쩌면 그게 다일지도 모르지. 훤하고 둥글게 뜬 달, 그녀의 얼룩진 얼굴이 보일 듯 말듯하다. 입은 옷이 낡기는 했어도 한때는 알록달록했을 색동이다. 여인은 광야의 벌판에 잠들어 있다. 뒤로는 강이 흐르는 듯, 강 건너는 얼음 같은 흰 산맥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코가 그림에 닿을 듯 다가섰다. 그녀의 감은 눈을 조심스레 쓸어보고 싶어서…. 눈을 감고는 있지만, 나처럼 자꾸 눈물이 흘러 번지고 있다는 생각에…. 그 여인의 눈가를 느껴보고 싶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삶이 힘들고 외롭고 고달파 울다 잠이 들었을 것만 같아…. 아직껏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만 같아….
나이 탓일까? 나도 인생은 고해라는 진리를 느낄 나이가 되었다는 소릴까?
커다란 사자 한 마리가 여인의 냄새를 맡고 있다. 그렇다고 여인을 잡아먹을 기세는 아니다. 어쩌면 사자에게도 어떤 연민의 정이 솟았을지 모르지…. 힘든 인생의 몸과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쉬고 있는 그 여인에 대한 연민….
음악 들으며 눈물 쏟아 본 적은 꽤 있다. 음악에 맞춰 춤인지 나발인지 추어 가며 눈물 흘려보기도 했다. 반 고흐나 밀레의 그림 보며 뭉클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눈물 흘려 본 기억은 없다.
루쏘는 형편이 어려워 미술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독학으로 터득한 그림이란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 덕분인지 그의 그림은 마냥 혼자서 꿈속을 누비며 다니는 사람의 그림 같다. 어쩌면 그렇게 외롭고 저린 가슴이 그린 그림인지라 그린 지 120년, 지구 반대편 코리아에서 온 내 가슴까지도 철렁 내려앉고 저리게 하는 집시의 그림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
여인의 냄새 맡고있는 사자의 숨결 속에 내 손길을 넣을 수 있다면…. 잠든 집시의 등을 잠시라도 따스하게 쓸어 줄 수 있다면…. 나 속의 집시가 운다.
<김성혜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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