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 오면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늦은 나이에 이민의 보따리를 풀고 낯선 이 나라에 문화를 익히기도 전에 이민생활 9개월째로 접어 들었을때, 남편이 갑자기 청신경에 이상이 생겨 전혀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 남편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 절망하며 몸부림쳤다. 엄청난 상실감에 실망하고 탄식하며 답답하고 외롭게 된 울분을 가장 만만한 가족에게 활화산처럼 토해내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이 세가지 감각 중 한가지를 잃어버린 그 후유증은 우리 가정에 불행의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매사에 빈틈이 없고 열정이 넘치던 남편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갔다. 의기소침해 지고 눈은 풀어지고 등은 굽고 말소리는 엄청나게 커지고 거칠어져 항상 주변을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걸핏하면 오해하고 분노하길 일삼았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고집이 센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해갔다. 매일 가족에게 트집을 잡고는 어이없는 싸움을 걸어왔고 자기 마누라 속을 있는 대로 긁어놓고는 시원한 듯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긁혀버린 나는 그 상처가 너무 쓰리고 아파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이렇게 매일 남모르게 속앓이를 해오던 나는 건강했던 내 몸에 암 덩어리가 자라나고 있는 것을 어느 날 발견하게 되었다. 남편이 장애인이 된 지 7년만이었다. 몇 년 전 2월14일 발렌타인데이, 눈이 펑펑 내려 하얗게 쌓인 날 암을 키운 내 몸은 병원으로 실려 갔고 그 두려운 수술실에서 생과 사는 하나님께 맡긴 채 마취주사 한번으로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가족들의 피를 말리게 했던 4시간이 넘는 큰 수술은 끝이 났고 운이 좋은 나는 눈을 떴다. 일주일 후에는 악몽 같았던 중환자실을 벗어났으나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또다시 나를 괴롭혔다. 팔과 다리가 수전증 환자처럼 떨리고 매일 마주해보는 거울 속에는 힘없는 웃음으로 지탱해 내고 있었다. 간신히 죽음을 피한 나는 심신이 황폐해져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몸도 가누지 못할 상태가 되어버린 나에게 한 잔의 물도 갖다 주지 못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고 거추장스러웠다. 우울증도 겹쳐 아무 의욕이 없고 자살이라는 단어가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살아가느니 그냥 수면제 한 주먹... 이런 생각에 빠져들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어려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우리보다 조금 젊은 어느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분들은 오래 전 중풍으로 쓰러져 중증 장애인이 된 부인을 그의 남편이 20여 년이란 긴 세월을 휠체어에 태우고 다니며 요람 속에 애기 다독이듯 먹이고 닦아주며 일그러져버린 부인의 얼굴을 마주보며 연인 인듯 속삭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은 부인을 위한 존재인 양 부인의 팔과 다리가 되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어 그분들을 지켜보았다. 부부는 돌아누우면 남이라는 말이 있고 긴 병에 효자도 없다고 한다. 이미 여자가 아닌 먹고 배설하는 본능뿐인 부인에게 그 오랜 세월을 저렇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낼 수가 있을까... 그들과 매일 만나면서 우리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분의 헌신적인 아내 사랑에는 인생의 깊은 진리가 담겨있는 듯했다.
부부의 인연은 소중한 한 몸이기에 한쪽이 병이 들면 다른 한쪽이 감싸 안으며 그 소중한 인연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어려운 일을 해내면서 자식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가정이란 울타리를 지켜왔고, 지금은 제 갈길 찾아서 떠난 자식들의 아늑한 고향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천사 같아 보이는 그 분이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실은 휠체어를 밀며 환한 미소로 거니는 모습을 떠 올리며 내 옆에서 고장 난 스피커처럼 볼멘소리로 떠들고(?) 있는 나의 연인에게 밝은 미소를 보내려 애쓰고 있다.
<김영자 포토맥문학회 저먼타운,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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