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일어난 3.1운동은 일본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거족적으로 일으킨 민족 해방운동이다. 일명 기미년 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 8월에 병합 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제는 최고 통치 기구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폭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여 한민족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했다. 학교에서는 민족 교육이 억압받고 종교계에서는 민족적 신앙이 탄압 당했다.
1910년대에는 국외에서는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국내에서의 비밀 결사 운동, 교육 문화 운동 및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해 운동 역량이 강화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1910년대 말에 국제 정세가 크게 변하게 되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국가의 식민지 처리에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했다.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 민족을 크게 고무하여 민족 해방 운동을 고양시켰다.
해외에서는 민족자결주의가 대두하자 이를 민족 해방의 기회로 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국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1919년 2월에는 동경에서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 독립 청원서를 발표했다(2.8 독립선언).
이러한 해외의 움직임을 알게 된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 측 인사들과 이승훈 등 평안도의 기독교계 인사들, 불교계 한용운 등이 참여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 3개 교단이 국내 독립 선언의 주축이 되었다. 이때에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하게 된 것이다. 1919년 2월 27일에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 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다. 그 후 고종 황제의 장례일인 3월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해 평양, 진남포,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 해방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3월1일 이후 전국을 휩쓸었던 시위 운동 상황을 살펴보면(이는 일본측 발표로 파악된 상황이라 한다) 집회 횟수 1,542회, 참가 인원 202만3,000명, 사망자 수 7,500명, 부상자 수 1만5,961명, 피검자 수 5만2,770명,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 학교 2개, 민가 715채나 되었다.
국내에서의 시위 운동에 호응하여 만주, 간도, 연해주, 미국 등지에서도 시위가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등지에서는 모금 운동을 통해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이 운동은 극소수 친일파를 제외한 전 민족적 항일 독립운동이자 계몽운동, 의병 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 투쟁 등 각 층의 다양한 운동 경험이자 우리 민족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독립 운동이다.
현재 조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리학적으로 내우외환의 딜레마에 빠질 우려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럴 때 3.1운동 같은 정신으로 조국을 수호하고 애국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김윤한 6.25참전유공자 비엔나,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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