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행로의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하느냐는 본인의 선택일수도 있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해서는 피할 수 없는 본인의 몫이다.
홍사익(洪思翊)과 지청천(池晴天)의 갈림에 대하여 회고하고자 한다.
이 두 사람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 동기생으로 1914년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한다. 동기생 중에는 이응준, 신태영 등이 있다. 김석원은 일년 뒤 1915년에 임관, 종전당시 일본군 대좌였다.
이들은 사관학교 생도시절, 특히 한일합방 이후 그들의 거취를 비밀리에 논의 한다. 계속해서 사관학교 교육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고국으로 돌아가느냐를 논의한다. 결론은 사관학교에 남아서 실력 배양에 전념하고 졸업 후에 거취를 결정하기로 잠정 결론을 내린다. 세월은 흘러 드디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 한다. 거취를 결정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지청천만 제외하고 모두 일본군에 잔류하기로 결정한다. 지청천은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교육에 전념한다. 후에 독립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일본군과의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중 청산리 전투는 역사에 빛나는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홍사익은 임관 후 성실하고 모범적인 장교로 동료장교와 상관으로부터 인정받는 우수한 장교로 성장한다. 그의 동기생이 중좌(중령) 또는 대좌(대령)일 때 그는 중장으로 진급되어 있었다. 일본이 패전할 당시 홍사익은 포로수용소 소장직을 겸임하고 있었던 연유로 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다는 죄로 전범으로 기소되어 한국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사형 언도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지청천 일본군 중위는 1915년 본인의 군영을 탈출, 조선 독립군에 가담한 사실은 엄청난 사건이다. 조선이란 나라는 1910년에 이미 일본에 합방되어 존재가 없어진 상태인데 그 조선을 되찾겠다고 그 엄청난 힘의 일본과 대적하겠다는 결심은 보통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조선의 광복은 독립군의 희생만으로는 기대하기 어려운 목표였다. 연합국, 특히 미국이 2차대전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지 못했다면 광복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지청천이 일본에서 망명, 독립군에 가입할 때는 일본과 미국이 전쟁 하기 수십년전이다.
그때로 돌아가 회고 하건데, 조선독립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던 시절에 지청천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 그의 일생을 걸었다. 다행히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봉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지청천은 홍사익에게 독립군으로 망명하길 권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남아있는 조선인 부하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될거라며 망명권유를 사양한다.
그 대신 독립군에게 자금을 제공했다고 한다. 홍사익의 일본어 발음이 완벽하지 않은 이유를 그가 조선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공언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이름으로 창시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고오 시요꾸”(洪思翊의 일본식 발음)다.
전범재판에서 그는 그의 이름 이외는 답하지 않았다. 기소된 내용을 반박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의 물음에는 시편 51장을 암송해 달라 하였다. “내 죄를 씻겨 주시고 나를 깨끗이 하소서” 를 경청하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intaklee@intak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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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탁 변호사/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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