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갈망하는 많은 덕목이 있지만, 그중에도 특히 겸손함이 쉽지 않다. 겸손에는 관용, 온유, 배려 같은 덕목이 녹아져 있어야 하기에, 우월감을 나타내기 위해 때로는 과장이나 포장까지도 하려는 우리의 본성과 대치되기 때문이다. 자만은 스스로 근거 없이 자기를 높이는 것이기에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경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는 말씀이 있다. 겸손은 타인을 자기 자신처럼 존중할 때만 가능하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우리의 연약함, 유한성, 무지함을 인정하여 그분 앞에 엎드려지는 것을 말하지만.
포항공대 총장을 역임한 본인의 가형의 좌우명은 “외유내강”인데, 그 겸손함으로 많은 존경을 받는다. 미국에서 박사과정 중 수학교수의 강의가 틀린 것 같아도 경솔히 질문하지 않고 집에서 신중히 검토를 해도 수긍이 안되면, 교수의 방으로 가서 형님의 풀이를 보이며 잘못을 지적해 달라 했다 한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 교수는 자기가 5년을 틀리게 가르쳤다며, 형님의 지적을 엄청 고마워하더라는 것이다. 교수도, 학생도 겸손한 모습이 아름답다.
수직관계를 미덕으로 강조한 유교문화 배경의 우리 기성세대는 아랫사람의 저항 없는 순종을 덕목으로 배웠기에, 아랫사람에게 겸손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심지어 영적 지도자들도 여간해서는 본인의 잘못, 실수, 또는 무지를 회중에게 이야기하기 힘들어 한다. 무의식적 차별의식 때문일까? 서머셋 모음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나도 모른다”란 대답을 하기가 그렇게 쉬운 것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자기의 과오나 무지를 인정한다고 해서 본인이 그만큼 작아지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주저한다.
대학원을 다니며 아내의 적은 수입으로 생활하며, 언어의 장벽 등 여러가지 스트레스가 많을 때 큰아들을 키웠다. 큰 아이 낳고 9년 만에 작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는 나아진 형편으로 아마도 둘째 아들에게는 좀 관대했나 보다. 하루는 십대인 큰 아들이 정색을 띠며 말하기를 “아빠는 동생에게는 매우 관대한데, 자기가 동생만한 나이에는 너무 심하게 대했다”고 항의를 해왔다. 뜻밖의 날카로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구차한 설명보다 무조건 “아빠가 잘못했으니 나를 용서해 달라”고 먼저 말한 후에 차차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그 후로 큰 아들과 지금까지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며칠 전 있었던 에피소드다. 오래전에 망막박리로 세계에서 으뜸이라는 존스 합킨스 대학 안과병원(Wilmer Eye Institute)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담당의사는 망막과의 과장으로 실력 있는 교수인데, 뽐내기는 커녕 보통 겸손한 것이 아니었다. 본인이 약물학 전공을 했다니 자기의 연구결과를 보여주며 본인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친구의 아들이 한국에서 와서 우리 집에 머물며 이분한테 수술을 받았는데, 보험 없는 사정을 이야기 하니 수술비를 절반으로 해주었다. 그 후 지금까지 같은 병원의 세 명의 안과 의사를 거치며 정기 진단을 받아왔는데, 공통점은 모두 지극히 겸손한 점이다.
며칠 전 현재 담당의사인 독일계 여의사의 진료실을 찾았다. 진료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기다리던 중 의사가 들어올 때 책갈피의 북 마커가 떨어졌다. 주우려고 본인이 일어나니 이분이 재빨리 허리를 굽혀 내 구두 앞에 떨어져 있는 북 마커를 주워 주는 것이 아닌가! 곡식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더니, 참으로 유능한 분들의 겸손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비록 사소한 사건이지만 이러한 작은 겸손의 향기가 가정, 직장, 사회에 퍼져 나가 선한 영향을 끼친다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박찬효 FDA 약품 심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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