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아래 두 돌부처, 벗고 굶고 마주 서서, 바람 비 눈 서리 일년내 맞을망정, 평생에 이별이 없으니 이를 부러 하노라.”
언제 누가 쓴 시조인지 모른다. 이북에 혼자 떨어져 소꿉동무 하나 없던 시절 고모가 가르쳐 준 시인데 어쩌자고 여태껏 내 기억 속을 헤집고 다닐까? 두 돌부처….
“인간의 삶 속에는 영원의 그림자가 들어 있다.”
언젠가, 어디선가 읽었던지 들었던 소리다. 어쩌면 바로 그런 때문에 인간이란 존재가 이 세상 다른 무엇보다 경이롭고 희한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개 돼지, 혹은 파리 모기는 영원을 생각해 볼 것 같지 않으니까. 또 바로 이 때문에 비극적 존재일 수도 있겠지.
우리 집 창가에는 일렬로 나란히 도자기 항아리들이 늘어서 있다. 신라 토기도 좀 있고, 고려청자, 조선백자도 몇 있다. 그리 말하면 남들은 “와, 신라 토기라면 1000년 전 것 아냐? 돈 들었겠네!” 할지 모른다. 하지만 값이 나가거나 명품에 속하는 것은 없다. 수두룩한 자식에 딸린 식구가 많아 항상 어깨 무거우셨던 아버지가 평생 선생의 푼돈으로 모으신 것이라 수수하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에 내게는 나름대로 애틋한 멋이랄까 아니면 맛이랄까 하는 것을 느끼게 한다. 마음을 가라앉혀 주기도 하고, 반대로 수백 년 혹은 천 년 전을 맛보게 하는 것 같아 마음 들뜨게 하기도 한다.
항아리들은 일 년 열두 달 내가 앉혀준 자리에 앉아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고층 아파트서 엘리베이터로 요요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며, 조급한 마음 서둘며, 무엇에 쫓기듯 헐떡대며 바쁘게 사는 나와는 달리, 늘 차분한 항아리들이 부럽기도 하다. 발아래 세상을 관조, 음미하며 살고 있는 듯 싶어….
붉고 찬란하게 뜨는 해나 피고 지는 꽃과 나무 보면 아름답다 할 듯 싶고, 발밑으로 날아다니는 새 보면 그들의 춤을 감탄 할 것도 같다. 밤이면 검은 융단 위에 좌르륵 쏟아부은 보석처럼 반짝대는 도시의 불빛이나, 하늘의 달과 별을 즐기겠지. 흘러가는 구름, 쏟아지는 비, 혹은 총총걸음으로 발걸음 서두르는 사람 구경도 할게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항아리들은 대부분이 보름달처럼 둥글둥글하다. 그중 키가 훌쭉 커서 눈을 끄는 백자가 하나 있다. 200 여년 전 조선왕조 때 권세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 항아리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태 항아리요?” 내가 되물었었다.
“귀한 집에서 애기 낳으면 태를 버리지 않고 항아리에 넣어서 묻어 두었나 보더라.”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애기 낳고는 태를 얼려 보관하는 것이 유행이라던데 조선왕조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생각 했나 보네요.”
“글쎄. 그리 볼 수도 있겠지.” 아버지가 웃으셨다.
나는 그 항아리를 볼 때마다 종종 짚어 본다. 저 항아리에 태를 묻고 태어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고.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하고. 또 항아리 만든 사람은?
아들의 태 였겠지? 아들이라야 제사 지내고 대물림 할 테니. 잘 생겼을까 아니면 그저 그랬을까? 출세했을까? 부인을 사랑했을까? 오래 살고 제 명에 갔을까 혹 귀양살이…? 내가 할 일 없나 보다. 가상의 인물 놓고 별의별 생각 늘어놓고 있으니…. 그래도 또 그려본다. 그 태의 주인은 자신의 태를 묻었던 항아리가 태평양 건너 미국에 와 우리 집 거실 창가에 앉아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때 존재 조차 없었을지 모르니.
항아리 속을 들여다본다. 혹 옛 주인의 그 무엇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서. 휑 뎅그라니 썰렁하다. 케케묵은 먼지만 몇오라기 이리저리 뒹굴고 있을 뿐. 아둔한 머리를 또 짠다. 혹 그 속에서 한 인간의 영원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을까 하면서.
남길 항아리조차 없는 나는…?
<김성혜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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