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16일 미명을 기해서 일어난 군사혁명은 대한민국의 정치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패러다임(Paradigm)을 바꿔놓았다.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제3공화국의 가장 큰 업적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 나라들 가운데 하나인 대한민국을 10대 경제 강국으로 도약 시킨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줄 믿는다. 그 당시에는 남한은 북한보다 더 빈곤한 나라였다.
경제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종자돈이 필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종자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첫번째로 일본에 대한 청구권을 발동했다. 그 당시 야당 정치인들은 대일 청구권 한일회담을 극렬히 반대했고 학생들의 반대 대모로 정국은 요동쳤다. 거듭된 협상 끝에 1962년 일본 측의 오히라 외상과 한국을 대표한 김종필 정보부장간에 합의로 보상금 3억불과 차관 3억불 총 6억불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경제개발을 위한 종자돈이 된 것이다.
종자돈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건설에 투입됐다. 고속도로를 주행할 차도 없는 나라에서 고속도로가 왜 필요하냐는 이유로 야당의 반대가 극렬했다.
언젠가는 한국도 많은 차를 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비전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자동차 산업과 기타 공업 개발을 위해서 포항제철 건설을 고집한 박정희 대통령의 안목 또한 높이 평가된다.
다음은 독일정부로 부터의 차관이다. 독일에 파견되는 광부와 간호사의 월급이 차관의 담보가 되었다. 독일에 파견된 간호원 1만명, 광부 8천명이 경제개발에 기여했던 것이다. 한국 사람의 근면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도 되었다.
월남전 참전은 가물은 땅에 생명수를 쏟아 붓는 계기가 되었다. 6.25때 한국을 도운 미국에 보은하는 기회도 되고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월남파병 장병의 월급을 미국 정부가 부담했다. 미군에게 지급되는 급여와 같은 기준으로 한국정부에 지불했다. 모든 장비와 군수품도 미국이 부담했다. 야전용 간이 음식(K-Ration;김치 등)까지도 한국 업자가 납품하고 미국정부가 대금을 지불했다. 장병들의 급여의 차액으로도 정부에 많은 보탬이 되었지만, 월남에 진출한 한국기업과 근로자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한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일조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중동 국가에 건설용역을 수출하는 계기로 국가 간의 교역을 아랍권으로 확대한 것도 이때다. 1976년에 완공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Jubail) 항만공사는 현대건설이 시공한 최대의 공사이며 한국건설업의 차원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10억불짜리 공사였다. 대우건설의 리비아에서의 업적은 지금까지도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서울로(路)가, 서울에 테헤란로가 생긴 것도 이때다. 월남전과 중동진출은 이렇게 많은 한국인이 외국과 접할수있는 최초의 기회였다.
옛것을 고집하는 한국인의 생각에 변화를 가져왔다. 새마을운동이 그러했고 정부의 행정관행을 바꿔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부의 공문서 양식은 일본 식민지 때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군대식이라고 새 양식을 폄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군에서 사용하는 양식이 초현대식 양식이었음을 부인키 어렵다. 5.16혁명은 한국 사람인 의식구조를 바꿔놓았다. intaklee@intaklee.com
(703) 658-8855
<이인탁 변호사/ 페어팩스, VA>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