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는 꽃향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수령이 오래된 상수리 나무들은 검은 터널을 만들었고 제각기 다른 모양의 집들은 개성을 뽐내며 조화를 이루었다. 그 사이, 낡고 오래된 케이프코드 주택이 나타났다. 마당에는 잡초가 우거졌고 찔레꽃 덩굴이 철쭉을 휘감고 있었다. 뒷마당은 낙엽을 치우지 않아 이끼가 무성했다. 앞마당은 적당한 크기로 평평했고 뒤뜰은 개들이 뛰어놀기에 충분했다.
2년전, HOA(Home Owner Association 주택소유주 연합)를 피해 집을 보러 다니다 만난 주택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오래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관리가 되지 않았지만 매매 서류에 사인하는 데는 문제되지 않았다.
3개월 후에 이사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태깔스러웠다. 마치 마을 전체가 같은 성씨를 쓰는 집성촌에 귀농한 기분었다. 오래된 동네이다 보니 거주민 대부분이 30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들은 마을 입구에 대형 병원이 들어설 때도 교통 혼잡을 이유로 함께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고, 근처의 매립지 사용 연장에 관한 공청회에서도 이전을 주장했을 것이다. 마을을 둘러싸고 신축 주택 단지가 조성될 때도 시끄러운 소음과 수시로 교통을 통제하는 불편함도 함께 감내한 그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낯선 동양인이 마을의 역사에 무임승차하게 된 것이 반가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 중 유일하게 나를 반색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롤드와 베티 부부였다. 해롤드는 70년대 한국에서 미군으로 복무했다. 그는 나를 만나면 한국에서의 청춘을 떠올리며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를 통해서 마을 사람들 얘기를 하나 둘 들을 수 있었다.
374번지에 사는 제이는 아내가 필리핀 여자인데 무려 서른 살이나 차이 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옆집에 사는 제시 할머니는 남편이 2년전에 심장마비로 죽어 혼자 살고 있고 나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해롤드에게 물었다. 서른 가구 남짓한 마을 전체가 왜 하나같이 같은 시기에 같은 꽃들이 피어나는지. 봄에는 일제히 수선화가 피어났고 4월에는 철쭉이 만개했다. 철쭉이 지면 아이리스가 뒤를 따랐다. 5월엔 집집마다 모란이 피었고 6월 말부터는 어른 키를 훌쩍 넘기는 칸나가 태양과 맞서고 있었다. 이유인즉 마을이 오래되다 보니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꽃들이 분양됐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해마다 같은 계절에 피어나는 꽃으로 서로의 유대를 표시하고 있었다.
2년이 지나는 동안 낡은 나의 집은 변해가고 있었다. 지붕을 새로 얹었다. 잡초가 무성하던 마당은 잔디로 변했고 죽어가던 철쭉은 꽃을 피웠다.
그렇게 집을 가꾸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인사를 건네오기 시작했다. 애완견을 데리고 나오다가 나를 발견하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던 모니카 할머니가 말을 건네왔다. “유어 그래스 이즈 소 그린!” “잔디가 녹색이지 검은색인가?” 생각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칸나를 마을에 분양한 로버트 네 집 앞을 개와 함께 걷고 있었다. 그가 먼저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했다. 나는 칸나에 대해 이야기했다. “해마다 칸나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풍경이 보기 좋았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칸나 뿌리를 캐가도 좋다”고 했다.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차라 바로 십 여 뿌리를 캐서 내 집 한켠에 심었다. 이제 7월이면 우리 동네엔 집집마다 칸나가 피어날 것이다. 물론 내 집에도…. 그렇게 나도 마을 공동체에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다. ted1591@gmail.com
<양태환 로턴, VA>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