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손가락! 아, 좋아라! 아, 행복해라. 아버지의 손가락은 이렇게 따스하고, 크고, 좋은 것이구나! 난 놓지 않을 거야. 꼭 쥐고 있을 거야.” 유행가 가사 같은 이런 소리가 내 손과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머리는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잡고 있는 아버지의 손가락 하나면 충분히 행복하고도 남았으니까. 온 세상이 다 내 손 속에 있는 줄 알았으니까.
1950 년 11월, 4년 만에 만난 아버지의 검지를 쥐고 평양을 떠나며 했던 생각이다.
1950 년! 6.25와 더불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 한반도에 살고 있었던 사람은 누구도 그 피해를 면할 수 없었지만 그때 부모를 다시 만나게 된 나로서는 기막히게 큰 행운이었던 반면, 또 한편 아무리 여섯이라는 어린 나이라 해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가게 되었으니 엄청난 불운이기도 했다.
여섯 살은 부모의 존재 가치를 가슴뿐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아닐까? 일제에서 해방된 후 나의 부모는 평양 근교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선생이셨던 아버지가 생명의 위협을 느껴 나를 조부모께 맡기고 월남한 것은 내가 두 살 때. 그때의 기억이라고는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단편이 몇 조각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 년 후인 여섯 살에 6.25가 났다. 그때 아버지가 날 데리러 오지 않으셨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9.28 수복 후 맥아더 장군이 압록강 가까이 북상하는 기회를 타고 아버지는 두고 갔던 딸을 데리러 평양으로 오셨다. 그러니까 두 살 때 헤어졌던 아버지를 여섯 살에 다시 만난 것이다. 맥아더가 아니었다면 난 영영 아버지를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살이라면 아버지의 기억이 거의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대번에 알아보고 아버지한테 달려가 안겼다. 영화에서 보듯 낯설어 민적민적 하는 감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떨어져 살았던 4년간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끔찍이 받고 자랐지만, 할머니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아버지 따라 서울행을 했다.
“공들여 키운들 뭘 해? 아비 왔다고 할미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는 것을….” 하며 할머니는 옷고름으로 눈물 닦으셨겠지. 억장이 무너지셨겠지.
그리운 엄마 만나러 서울로 가는 길. 아버지의 등에 업혔다가 힘들다 하시면 내려서 아버지의 검지 쥐고 걷고, 또다시 업혔다 내려서는 손가락 잡고… 거듭 하면서 기차역까지 갔다. 기차에서 미군들을 몇 본 기억이 나는데 아버지는 그들과 영어로 솰라솰라 했다. “하이, 안녕하세요,” 정도의 영어였겠지만 난 솰라솰라하는 아버지가 누구보다도 높고 훌륭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런 아버지 덕(?)이었던지 나는 특별히 기관실 바로 옆 석탄 더미 위에서 잘 수 있었다. 눈부신 아침. 기차는 덜컹거리며 선로 위를 가고 있었고 나는 석탄 더미에 깐 가마니, 그 위에서 잠이 깼다. 그 아침엔 햇살이 유난하게 반짝대고 있었다. 새카만 석탄 조각들마저 반짝거렸다. 아, 행복한 아침! 서울 가면 엄마와 동생들을 만날 것이다. 석탄 위에서 잤으면 보나 마나 내 꼴은 온통 검정투성이였겠지. 그게 무슨 상관이랴? 아버지와 서울 가는 판인데. 엄마도 만나게 되었는데. 행복의 아침이었다.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사람 있을까?
“아버지,” 하고 불렀더니 기관실에서 기관사와 이야기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성혜야, 나 여기 있다. 깼니? 잘 잤니?” 하셨다. 꿈이 아니고 진짜인 나의 아버지가!
난 그 아침을 지금껏 기억한다. 황홀하고 행복했던 아침, 아버지를 찾은 아침, 아버지의 손가락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그 아침.
삶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이렇게 지극히 간단 단순한 것임을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 손가락 하나만 쥐고 있어도 세상이 다 내 것일 수 있음을 몰랐다. 그것이 숨쉬듯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얼마나 귀한 것인 줄도 몰랐다. 또, 그 시간 역시 한 번뿐인 것,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 후에도 오랜 시간을 두고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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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혜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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