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6월이 지나갔다. 6월이라는 소리는 아직도 내 명치끝을 아릿하게 한다. 6살 때 터졌던 전쟁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괴물은 전선에서 총 들고 싸우는 사람만 어렵고 힘들게 하지 않는다. 아이, 어른,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누구든 잡아먹을 듯 할퀸다.
“김미 쪼꼬렛, 김미, 김미, 김미 쪼꼬렛!” 피난시절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이 미군을 보면 쫓아가며 외쳐댔던 소리다. 하지만 난 그 소리를 한 번도 따라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잘나서? 철이 들어서? 구걸하는 게 치사해서? 수줍은 성격이라서? 창피해서? 우리 집에 먹을게 많아서? 천만의 말씀이다. 다 틀린 소리다. 애는 애였지만 나는 동네 아이들 뒤쫓아 다닌다는 것조차 사치에 속하는 위치였다.
부산 피난 시절 어머니는 나의 네 번째 동생을 낳았다. 맏이인 내가 겨우 일곱 살, 여덟 살인데 다섯째 아이를, 그것도 끔찍이 추웠던 1월에 말이다. 먹을 것도 없는 전시에 해산한 어머니는 몸이 약해 이빨 다 잃고 오랫동안 몸져누우셨다. 애기보는 일이나, 기저귀 빠는 일, 그 외에 할 수 있는 집안일은 돌아가며 다 내 몫인 애어른인 판인데 언제 동네 아이들처럼 “김미, 김미….” 를 외쳐대는 호사스런 짓을 할 수 있었겠는가? ‘쪼꼬렛’을 외치며 뛸 수 있다는 것조차도 내게는 허영스런 노릇이었던 것을. 고아는 물론 부모형제가 있는 아이도 눈보라 치는 허허벌판에 버려진 외톨이로 만드는 마수의 괴물이 전쟁이다.
미군들은 날 보면 으레 카메라를 꺼내 사진 찍었다. 내가 워낙 예뻐서 그들이 내 사진을 찍는 거라 믿고 애써 웃어 보였다. 고개 가누지도 못하는 아기 등에 업고….
그 미군 중 한 사람은 여러 번 날 찾아왔다. 난 한 번도 “김미 쪼꼬렛,” 소릴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는 어떤 때는 쪼꼬렛을, 혹은 껌과 사탕을, 때로는 장난감도 갖다주었다. 한번은 금발 머리에 긴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눈을 감았다 뜨기도 하고, 설 줄도 알고, 앉을 줄도 아는 바비 인형을 주었다. 줄줄이 선 동생들한테가 아니고 나한테 말이다.
물론 누구에게 주었던지는 상관없이 군인이 가고 나면 맏이였던 나는 동생들한테 다 줘야 했다. 내가 그리 좋아했던 인형조차 주고 나서는 얼마나 외롭고 슬펐던지 모른다.
한번은 그 군인이 다시 왔는데 언제나 내 등에 혹처럼 달려 있던 아기가 그날엔 없었다. 군인은 나를 번쩍 안아 올려 자신의 등에 업어 주었다.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 모두가 다 잊어버린 나를 아이로 대접해 준 것, 바로 그것이 천국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오지 않았다.
난 아직껏 그 기분을 가슴에 안고 산다. 내게 꿈과 희망을 준 그 사람 말이다. 그 순간 말이다. 난 미국 가서 그 군인을 만나보고 싶었다. 아니, 그 사람 만나고 싶어 미국 가려고 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가서 만나면 당신 덕에 내가 이렇게 여기 살아 있노라고, 당신은 장하고 아름다운 분이라고, 고맙다고…. 꼭 알려주고 싶었다.
아직도 난 묻곤 한다. 6.25 참전했던 제대군인들을 만나면 말이다. “혹시 1951년에서 ‘53년 사이 부산에 주둔하지 않았나요?” 하고. 아직 만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하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제는 내 마음이 바뀌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때 날 업어 주었던 군인은 그냥 어쩌다 우리가 사는 동네를 지나친 군인이 아니고 신께서 잊지 않으시고 날 위해 보내준 그의 사랑이었음이 분명하다고. 그가 보내주신 천사임이 틀림없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지천으로 깔린 고아들, 불쌍한 아이들 중 유별스레 나를 찾아왔겠는가? 신께서 보내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부서지고 아팠던 내 마음을 알아서 안아주고, 업어 주고, 상처를 보듬어 주었겠는가? 희망과 꿈을 안겨 줄 수 있었겠는가?
그가 준 것은 쪼꼬렛 보다 깊고 아름다운 삶의 용기, 삶의 희망을 심어준 사랑이었다. 그래서 난 믿는다. 사랑의 열매는 희망이라고. 희망이 바로 사랑의 딸이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그 사랑의 열매를 놓지 말라고. 잃지 말라고.
<
김성혜 맥클린, VA>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