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끝난 후 자유를 찾아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부산시를 비롯하여 남해안 도시에 몰리는 통에 도심의 산꼭대기까지 판자촌이 성시를 이루었고,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유입으로 전셋집이나 월세 방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난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버지는 자칭 사업가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미군 지.엠.씨 트럭을 불하받아 운송업을 하면 큰 부자가 된다는 말을 믿고 논 30마지기를 팔아서 미군용 트럭 3대를 사서 운송 사업을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운전수 세 사람이 차량과 함께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를 만회하려고 여러 사업을 시도해 보았지만 가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시내 중심지에 있던 기와집마저도 팔아서 사업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양철 지붕의 방 2칸 짜리 월세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정한 고정 수입이 없는 상태여서 어쩌다 월세가 며칠이라도 밀리면 인색한 주인으로부터 면박을 받기가 일수였다. 마루에 홀로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낙담해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선연히 남아 있다.
50년 전 내가 월세 집에서 힘들어 했던 그때나 지금이나 셋방살이는 별반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해마다 오르는 전세금, 월세와 과도한 부채를 안고 집을 마련해서 한 달에 수입의 50% 이상을 집값 갚느라 힘들어 하는 세입자들이 언론 보도에 의하면 한국 전체 인구의 60%를 넘어 섰다고 한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서민이 생활하는 주거문제는 더욱 악화일로에 있다. 왜 이런 엄청난 일이 개선되지 못하고 반복되는 것일까. 지나간 모든 정권들이 시장의 논리에만 핑계를 대고 과반수가 넘는 서민들을 위한 저렴하고 안락한 주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백년대계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성공사례를 보자. 오스트리아는 1945년 2차 대전 종전 후 나치 치하를 벗어난 후 세계 각국과 문화, 관광, 예술 등의 교류를 통해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나라가 부유해지자 그에 따르는 큰 부작용이 뒤를 따랐다. 아파트 월세가 해마다 2 자리 수 이상으로 치솟아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듯이 높았다. 정부와 의회의 지도자가 거국적으로 이마를 맞대고 연구한 끝에 세계 역사상 전대미문의 혁신적인 개혁안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정부와 국회가 합심하여 직접 가장 값싸고 질 좋은 아파트를 건설하여 모든 서민에게 현재 아파트 월세의 1/10 만 지불하게 하는 방안이었다.
왜 오스트리아는 할 수 있고, 대한민국은 못하는가. 그 해답은 간단하다. 부정부패 때문이다. 대우조선 사태를 보라. 사장과 노조직원 전원이 합심해서 산업은행 관리단의 묵인하에 분식회계를 통해서 흑자가 난 것처럼 거짓으로 조작해 수조원의 국민 세금을 개인들의 호화생활에 썼다고 한다. 부정부패로 물든 모든 부실기업들은 하루 빨리 정리되어야만 하며 구조조정에 사용될 국민의 세금을 중단하고 그 공적자금으로 오스트리아처럼 정부가 직접 서민 임대주택을 건설하고, 파격적으로 낮춘 월세로 서민에게 공급하여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서민들의 시름을 불식시켜 주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생각된다.
<대니얼 김 그린벨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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