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그곳의 화폐를 남겨 가져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엔 사진에라도 담아 온다. 화폐 속엔 그 나라가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 인물들 혹은 자연의 경관과 특산물 중 엄선하여 제한된 화폐의 지면에 담아낸 그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지난 4월 미국에선, 미국의 화폐엔 여성이 한 명도 없다는 목소리를 듣고, 역사 속 많은 여성 중 누굴 화폐에 넣을 것인가, 또 현재 화폐 속 인물 중 누굴 빼고 넣을 것인가 많은 논의를 거쳐 발표하였다. 노예해방운동가로 미 남북전쟁 당시 노예탈출을 도왔던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이 현재 20불 앞면의 앤드루 잭슨 대통령을 대체하게 된다. 원래는 10불 앞면에 있는 알렉산더 해밀턴을 빼기로 하였다가, 올해 토니상을 휩쓸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역사를 새로 열었다는 해밀턴 뮤지컬의 인기로 해밀턴 대신 앤드루 잭슨 대통령을 빼기로 결정을 번복하였다. 1929년 이후 한 번도 미국 화폐의 초상화가 바뀐 적이 없었다는 것으로도 화폐 속 인물 결정이 얼마나 심사숙고를 요하는 일인가 짐작케 한다.
얼마 전, 엘살바도르에 출장을 가 머무는 동안 그곳엔 자신들의 화폐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1892년부터 써오던 살바도르 페소를 버리고, 2001년에 미 달러를 공식 화폐로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전에 쓰던 화폐를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니, 1892년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카를로스 에르제테Erzete가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스페인식 발음인 콜론 colon으로 바꾸어, 지폐 앞면엔 콜럼버스의 얼굴을, 뒷면엔 마야문명지와 화산산 등을 담은 살바도르 페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논의 끝에 안정적 거시경제 구축을 위해, 2001년 그들의 화폐 대신 미 달러화를 택했다.
이렇게 각국의 통화를 주변의 기축통화에 고정시키거나 자국의 통화를 버리고 기축통화를 채택하는 것을 '달러화'라고 한다. 이는 꼭 미 달러화의 채택만이 아니라 남아공 주변의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이 남아공 화폐를 채택한 것, 유럽의 여러 국가가 유로화를 채택한 것도 모두 달러화라고 일컫는다. 공교롭게도 엘살바도르에 머무는 동안, 6월 23일, 유럽에서는 영국의 유로 탈퇴 ‘브렉시트(Brexit)' 투표가 있었다. 영국은 유로에 가입할 때도 예외적으로 자국의 통화 파운드는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통화엔 대영제국의 찬란한 역사가 새겨져 있음을 볼 때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2002년 1월 유로화가 공식적으로 통용되기에 앞서 2001년 12월 27일, 나는 사라질 유럽의 각국 통화를 샀다. 경제적인 것만 따지자면, 며칠 뒤면 경제적 가치를 잃고 종잇조각이 될 지폐를 미 달러를 주고 산다는 것이 멍청한 일이지만, 나는 곧 잃게 될 그 각국의 지폐에 새겨진 고유한 역사성과 그들만의 가치를 몇 조각이나마 간직하고 싶었다.
스무 살 때 배낭여행으로 유럽을 돌아다니며 각국의 지폐 속에 담긴 인물과 장소를 궁금해하며 들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나의 추억들을 기억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 중 프랑스의 지폐, 특히 50프랑 지폐가 좋았다. 앞면엔 <어린 왕자>를 쓴 생텍쥐베리의 초상화에 어린 왕자, 별과 달이, 그리고 뒷면엔 어린 왕자와 별 뒤로 환상적인 오렌지빛, 보라와 분홍빛이 어우러진 하늘을 배경으로 프로펠러 경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사진이 담긴 작은 작품이었다.
유로화 이전의 유럽 역사는 수천 년간 민족과 나라로 갈라져 싸운 전쟁으로 이어졌다. 최악의 절정인 2차대전을 겪은 후, 유럽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에서 유럽 공동체를 키워왔다. 그러나 그 공동체 의식은 최근에 시리아 및 아프리카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오며 도전받고 있다. 각 나라가 고유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류의 보편성과 공동체 의식을 잃지 않는 성숙한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그러한 세상의 지체인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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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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