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리워지는 민족의 지도자, 진정한 애국자, 백범 김구 선생 생각이 간절하다. 백범은 1876년 8월29일에 태어났다. 금년 8월이 탄생 140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백범은 교육자로 양산, 보강 등에서 교편을 잡던 중 교육계몽 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수감되기도 했다. 1919년 망명하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정무국장 내무국장 국무총리 대리 그리고 주석 직을 맞았던 거물이다.
특히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친일파 암살과 일제 주요공관 파괴와 군자금 모금을 주도했다. 그뿐 아니라 이봉창 의사의 동경 의거, 운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를 지휘하여 독립운동사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렇게 청춘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45년 뜻밖에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이하였다. 69세의 노인이 되어 그렇게도 밟아보고 살고 싶었던 조국에 돌아왔다. 조용하고 평범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해방된 조국을 남한은 미국, 북한은 소련이 통치하려는 신탁통치를 운운하자 분연히 일어나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신탁통치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오로지 남북이 하나 되어야 한다. 민족전체의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 국가를 이루어야한다. 그것이 바로 독립운동의 목표였다. 그래서 남한만의 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견해를 같이할 수 없어 결별하고 홀로 38선을 넘어 방북하여 김일성과 연석회의를 열어 남북통일 총선거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오니 결국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주둔하는 분단국가가 되고 만다. 실로 통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라가 둘로 갈린 채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북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우고 1948년 남한도 정부를 수립하고 총선을 통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니 반탁운동을 주장하던 백범 김구는 설자리를 잃은 고독하고 외로운 애국자가 되어 사저 경교장에 기거하던 중 1949년 6월26일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권총으로 암살을 당하고 만다.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을까.
그래서 그의 어록은 통일된 하나의 조국을 그리워하며, 분단을 서러워하는 한 맺힌 부르짖음이요 피맺힌 호소가 담겨있다.
“너의 소원이 무엇인가?’ 라고 하나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저의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인가라고 물으시면 나는 또 다시 ‘우리나라 독립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인가?’ 라고 세번을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몸을 반쪽으로 나눌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볼 수 있겠는가!
가련한 동포들이 남북으로 흩어져 떠도는 꼴을 차마 더 볼 수 있겠는가!”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당이라든지 사상 특정한 단체 또한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현 시국에서 우리 민족의 유일이자 최대의 과업은 좌파와 우파의 합작 독립의 쟁취입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나는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인신의 구차한 안일을 추구하지 않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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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규 은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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