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도서관에서 우연히 ‘아가멤논의 딸’이라는 책을 집었다. 표지 안쪽에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Ismail Kadare)의 약력이 눈을 끌었다.
알바니아 태생으로 공산 독재정권 하에서 글을 썼고, 원고의 외부 반출이 금지된 상태에서 1986년부터 자신의 원고를 몇 장씩 비밀리에 프랑스로 보내 작품을 출간했으며, 2005년 제1회 맨부커 국제상을 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며칠 전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많은 나라에 출장을 다녔는데, 시간이 나면 다시 가고픈 나라가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알바니아”라고 답했었다.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들, 싸고 맛 좋은 와인,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서유럽 기독교 세계를 지켜낸 영웅 스캔더베그, 테레사 수녀가 태어난 곳… 그곳에 다시 가서 아드리아해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좀 더 알고 싶었다. 2013년 그곳에 갔을 때 공산정권의 유산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지만, 독재정권하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짐작도 못한 채 떠나왔다.
‘그보다도 더 나쁜 건 휘청거리는 양심이 전력을 다해 자신을 합리화 할 구실을 찾아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날이 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집단적 죄의식이라는 톱니바퀴 속에 점점 더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단상에 올라 발언하고 비판하고 흙탕물을 끼얹어야 했다. 처음에는 우리 자신한테, 그다음에는 다른 모든 사람들한테. 그보다 더 악마적일 수는 없는 메카니즘이었다. 일단 우리 자신을 더럽히고 나니, 그 다음에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더럽히는 일이 쉬워졌다. 하루하루가 갈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도덕적 가치들은 훼손되어 갔다.’
독재 정권에 아첨하지 못하고 불만에 가득 찬, 라디오 문화부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독재 정권 권력 서열 10위 내에 드는 권력가의 딸을 사랑하면서 겪는 심리적 갈등과 사회 현상을 그린 책이었다.
‘심리적으로 위축 되고 영혼이 산산이 부서진 우리는 이 회의에서 저 회의로 불려 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점점 더 하릴없이 무너져만 갔다… 회오리가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을 휩쓸고 지나가자 그때부터는 문화계 전반에 걸쳐 광기가 퍼져 나갔다.’
수십 년 전 알바니아에서 벌어진 일을 묘사한 문장들이 박근혜 정권 하에서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그린 듯했다. 얼마나 많은 희생 위에 이루어 놓은 민주주의 사회를 그녀는 독재 정권의 사회로 바꾸어 간 것이다.
최근엔 탄핵을 놓고, 수구파에선 언론의 조작이니 좌파의 음모니, 탄핵 불가 시위를 한다고 하고, 급기야 얼마전에는 박사모의 한 멤버인 어르신이 투신자살을 했다 한다.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이 ‘슈퍼 갑’ 최순실의 딸의 갑질과 그 권력에 기생해 권력과 재물을 얻으려는 이들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젊은 여대생들로부터 시작됐다는 걸 그들은 벌써 잊은 건가. 젊은 여대생들의 절규는 결코 조작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모든 도덕적 가치들을 훼손하고 젊은 영혼을 산산이 부수어버린 대통령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같은 역사의 반복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정치적 발언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 나지만, 책 속의 주인공이 ‘하느님, 이 나라를 비인간화에서 구하소서. 또 하나의 황폐화를 막아주소서. 숨 막히는 열기와 먼지 사막도 하지 못했던 짓을, 이 나라는 저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탄식했듯, 나는 모국의 뉴스를 보며 터져 나오는 탄식을 삼킬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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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워싱턴 문인회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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