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생각나는 나의 아버지! 아버지 날이 있는 6월에 들어서면 더욱 그리워지는 나의 아버지의 음성, 어릴때부터 어머니가 늘 편찮으셨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나의 문제는 항상 내 자신이 먼저 깊이 생각한 후에 마음에 어느 정도 결정이 되었다고 생각되면 아버지께 의논 드리면서 나의 생각을 말씀드리곤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에게는 아버지시면서 또한 어머니셨다. 내가 하고 싶다는 것은 늘 찬성해 주시고 믿어주시던 아버지, 그러기에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어려운 그늘이 우리 가정에 덮칠 때 흐린 등잔 불 밑에서 고민하시며 안타까워하시던 아버지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식들이 걱정할까봐 “너무 염려들 마라, 이제 좀 나아지겠지 내가 너희들을 굶기기야 하겠냐? 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날, 큰 사업을 하실 때 그 당당하시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얼굴에 비친 초조함과 비참한 모습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하루는 피아노 레슨을 해 주려고 집을 나서서 가다가 동네 가게에서 나오시는 아버지와 만났다. 아버지는 신문지에 싼 땅콩 한 줌을 쥐고 계셨다. 아버지는 웃으시며 “너 어디 가니” 하며 물으셨다. “네, 피아노 레슨 해주러 가요” 대답하는 아버지는 “내가 땅콩을 좀 샀는데 가면서 먹어라“ 하시며 주시기에 나는 금방 알아차리고 “ 아버지! 땅콩 들고 가시는 것을 보니 극장에 가시는군요. 그렇지요”하고 물었다. 아버지께서 “어떻게 알았냐? ”하시기에 “땅콩 잡수시며 재미있게 보고 오세요.”하며 웃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얼마나 답답하시면 그러셨을까? 집 앞에 새로 생긴 극장은 2류 극장이지만 새 영화도 자주 상영되곤 했다. 한 줌밖에 안 되는 땅콩을 사 든 아버지를 뵈면서 마음이 아려왔다. 사업을 크게 하시다가 망하게 되니 마치 영화 속에서 보듯, 그 비참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자라면서 그런 어려움을 겪은 것이 결코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했다. 어려울수록 식구들이 단합해서 뚫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일찌기 배웠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을 지니게 되었다.
아버지의 존재는 바람 부는 언덕 위에 묵묵히 서 있는 큰 고목처럼, 항상 그 자리에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며 지친 몸을 쉬게 해 주는 존재이다.
일찌기 큰오빠 초청으로 미국에 오신 아버지는 그 당시 60세이셨는데 한국에 남아 있는 식구들을 모두 미국에 데려 오시려고 시민권을 받으신 다음, 볼티모어에 있는 이민국을 왔다갔다 하시며 결국에 한국에 남아 있던 온 가족을 모두 미국으로 데려 오셨다.
“내가 내 식구들을 이 좋은 나라에 데려다 놓았으니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부지런히, 열심히 일해서 기반을 잡아라” 하시던 말씀이 늘 귀에 쟁쟁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들을 위해 온 사랑과 희생을 아끼지 않으신 나의 아버지!
글을 쓰다 보니 아버지가 더욱 더 그립다.
<
박혜자 포토맥 문학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