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밥솥에는 밤이면
이팝나무 꽃 하얗게
피어 있었네
꽃잎 하나 흐트리지 않고
봉긋하게 피어 있었네
누가 오면 어쩌나
무얼 들킨 사람처럼
말하는 건
엄마는 기다릴 사람
있던 거라고
누구를 기다리는 건
캄캄한 밥솥에 환한
밥 한 송이 피워놓는
일이라고
엄마의 한생으로 간절한
고봉밥이
모락모락 피었다가 졌네
무거운 밥솥을 열면 한밤에도
이팝나무 꽃처럼 피어 있던
고슬고슬한 밥 한 송이
- 권귀순의 시
‘밥 한 송이’ 전문
여러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 그들이 들어있는 세계가 보인다. 한 시인 특유의 “시 세계”라고 할까. 예를 들어 황지우 같은 시인은 “대폿집에 앉아 있는” 상이고 김소월 같은 시인은 “산 속에 홀로 핀” 외로운 상이고, 이상화 시인은 “꽃처럼 피어오르는 젊음의 첨단”에서 새벽의 첫 서리를 견디는 상이다.
최근 워싱턴 지역에 소개 된 시집 ‘백년 만에 오시는 비’의 권귀순 시인의 시를 읽으며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시인은 어린아이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녀의 언어구사를 보면 새롭게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문맥이 닿지를 않는가 하면, 어디 가서는 문맥이 닿기도 하여 우리 어른들을 어리둥절 하게 한다. 여러 색채가 이리저리 흩어졌다가 모이곤 하는 추상화 같은 느낌이다.
이 시인은 Metaphor(은유)를 이리 저리 늘어 놓으며 스토리를 이어간다. “밥”이 “한 송이” 꽃이 되는 것은 어린 시절 시인이 느꼈던 그 황홀한 세계의 표현이다.
이 시집의 이름 ‘백년 만에 오시는 비’에서 “오시는 비”는 강렬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부터 농사 하는 사람들은 “비가 오신다”고 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선물로 “오신다”는 경어를 쓴 것이다. 때로는 신 자신이 오시는 것으로 느꼈는 지도 모른다. 오시는 비는 반가운 것이고 오시는 비는 새로운 변신으로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이다. 단비를 맞은 시인은 새롭게 탄생한다. 그러나 이 재활과 기쁨의 노래는 또한 백년 동안 비를 기다려야 했던 시인의 목마름과 아픔의 스토리이다.
시 ‘밥 한 송이’를 읽어 본다. 밥을 한송이의 꽃으로 표현하고 있다. 밥이 꽃이다. 꽃은 무엇인가. 꽃은 시인이 좋아하는 것, 어여쁘고 향기롭고 황홀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 그리고 밥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생명의 양식. 밥을 꽃으로 변신시키는 신비의 비밀은 ‘엄마’이다. 어린시절, 어머니 밥솥에 있던 밥은 아예 ‘이팝나무 꽃’이 되어 하얗게 피어 오른다. 하루종일 나가 돌아다니다가 배고파 돌아와 밥을 본 아이의 황홀함은 이팝나무 꽃의 크기와 비례 한다.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의 기다림은 이팝나무 꽃이 되어 언제 까지나, 언제 까지나 시인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어린 아이의 티없이 맑은 감각과 시인의 섬세한 감각이 겹쳐지는 이상한 고장에서 나타나는 요술나무 처럼, 이 시는 신기하고 아름답다. 나는 옛날에 추운 겨울날, 밤 늦게 돌아오면 아랫목에 묻혀있던 따끈따끈한 놋주발을 지금도 그리워 한다.
<
김명희 번역문학가 (D.C.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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