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받았다. 지난 연말에 2년여 동안 기른 머리카락을 잘라 봉투에 넣어 보낸 후 한 달쯤 되어갈 때였다. 난 그저 잘 접수되었다는 카드 통보나 짤막한 감사 노트 정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페이지 가득 빼곡히 쓰인 편지가 왔다. 감사의 말과 함께, 암과 투병 중인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자 머리카락을 모아 가발을 만들어 무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보고까지 곁들였다. 머리카락 기부를 받는 몇몇 단체들과 그들 중 어떤 곳은 가발을 만들어 고가에 팔기도 하지만, 100% 순수하게 기부하는 이곳 정보를 알려 준 딸아이들이 새삼 대견하고, 또 감사했다.
흰머리가 더 많아지기 전에, 인생의 마지막 기회로 기부를 작정하고 머리를 기른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분명 내 몸에 붙어 자라고 있는 머리카락이지만, 난 그 머리카락을 이미 내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으로 대했다. 그래서 항상 바쁜 생활에 쫓겨 돌보지 않던 머리카락에 딸아이들이 쓰는 영양제 오일을 바르기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될 텐데 푸석푸석해선 안 되겠기에. 아이들이 원하는 것처럼 찰랑찰랑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되도록 애썼다. 흰머리가 많이 섞여 있으면 기부를 안 받으니, 머리를 기르는 내내 흰머리가 보일 때마다 열심히 흰머리를 뽑아냈다. 내 몸이 내 것일 땐 그리 정성을 들아지 않았는데, 내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자 최상의 상태를 드러낼 책임을 맡은 관리인이 되어 정성을 다했다.
불교에서는 머리카락을 모든 번뇌의 상징으로 여겨 삭발로 구도의 첫걸음을 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머리를 기르며 삶의 도를 깨우친 셈이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소유인 것이 없으며, 자신이 죽을 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역설적 진리.
‘나무뿌리가 좀 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닐 때, 무언의 말이 만능의 말이 되고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이 된다고 한 김수영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한국의 독재정권하에서 침묵을 강요당한 정치적, 시대적 아픔을 배경으로 한 시지만, 창밖에 앙상한 가지로 떨고 선 겨울나무가 그 시가 전하는 역설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 푸르던 옷을 모두 벗고 죽은 듯 처연히 서 있는 겨울나무. 하지만, 나무가 자신을 버림으로써 더 큰 자신이 되어가고 있음을 안다.
죽은 듯 처연히 서서, 바닥에 흩어진, 부러진 가지들을 바라보는 저 나무는 어떤 심정일까. 미장원에서 거울 앞에 앉았던 그때 내 심정 같을까. 서늘한 가위가 목덜미를 스치며 두 갈래로 묶인 긴 머리카락을 싹뚝 싹뚝 잘라 낸 후, 봉지에 담긴 머리카락을 바라보았을 때의 그 마음. 의식적으로 시작한 일이었음에도, 막상 잘린 머리카락을 보니, 내 청춘에 마지막 고별을 할 때임을, 다시 내게 되돌아올 수 없는 내 삶의 한 자락을 떠나보낼 때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감상을 떨치기 위해, 스스로를 다독이려 편지를 다시 들여다본다. 편지 속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쓴 ‘Priceless’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돈이나 물품을 기부하면 영수증을 받아서 세금 보고할 때 기부액으로 공제를 받는다. 하지만, 2년을 넘게 공을 들여 길러 자른 머리카락을, 우편료까지 내 돈을 내고 보낸 이 기부는 세금보고 시엔 기부로 간주하지 않는다. ‘Priceless’는 말 그대로 옮기자면 마치 값없다는 ‘가치없는’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매우 귀중한’을 뜻한다. 남은 생 동안, 가치를 잴 수 없게 귀중한 것들로 삶을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말없이 선 겨울나무를 보며 다짐한다.
<
송윤정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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