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에 사는 10살 조카와 화상통화를 했다. 매번 커가는 조카딸이 어쩜 그리 귀엽고 예쁜지…. 그 아이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 고모인 내 무릎을 독차지했던 아이다. 같은 침대에서 기어이 그 아이를 끼고 잤을 만큼 우리 사이는 돈독했다. 그런데 새해 들어 무슨 말끝에 으레 묻는 “그래서 고모 좋아?”라며 둘의 사이를 확인하는 순간, 별안간 느껴진 머뭇, 주저, 떨떠름한 반응이 감지됐다. 그러더니 끝도 없는 애정확인을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투로 한마디 뱉어냈다. “아 몰랑! 나 채린이 언니랑 수영 갈 거야.”
참으로 어이없고 예고 없이 찾아든 앙큼한 배신이었다. 여태까지 미국 명절과 한국 명절에 아마존을 통해 저한테 실어 나르고 들인 공이 얼마인데, 아래 핏줄한테 당한 배은과 망덕의 일격은 실로 아픈 일이었다. 민망했던지 동생네가 황급히 끼어들어 설명조로 말했다. 요즘은 조금만 말이 막히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면 애교 조로 “아 몰랑!” 하면서 자기 할 말을 잇는 게 대유행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고 나니 이 무슨 돌연한 변덕인지, 그렇게 애석하고 속상하던 조카딸의 ‘아 몰랑!’이 왠지 여성스럽고 백치스런 애교가 오돌오돌 묻어있어 귀여웠다.
처음에는 개그 콘서트 같은 곳에서 어느 개그맨이 하는 말로 짐작했는데, 알고 보니 지난해 한참 촛불이 일고 최모 여인과 대통령의 국정농단으로 나라가 뜨겁던 시절에 페이스북에서 어느 두 여성이 나눈 대화에서 ‘아 몰랑!’ 현상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 모두 그 일을 시차 없이 겪었으면서도 그놈의 현장감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너무 많아 포기한 예능프로그램을 챙겨보지 못해서인지 나로서는 ‘아 몰랑’ 현상이 조금 충격이었다.
자칫 천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대화 내용과 그 대화에 걸맞게 맞춤법이 틀렸음에도 분명히 전달되는 텍스트 문자 특유의 감정과 심지어 콧소리마저 담아내고 있는 그 기묘한 음성의 시각화가 돋보였다.
그렇게 시작된 ‘아 몰랑!’ 현상은 인터넷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 재생산되다가, 된장녀와 김치녀 등 나중에는 김 여사의 잔상으로 그 이미지와 열기가 옮겨 붙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여성비하로 확대되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와 이제는 남녀노소, 온 국민이 뭔가 체계적으로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 어물쩍 애교 같은 수작으로 “아 몰랑!” 그렇게 결말을 짓는 전혀 새로운 대화법을 낳은듯했다. 깊이로 보면 ‘아 몰랑!’ 뒤에는 ‘상황이 복잡해서 내가 조리 있게 설명하기 어려우니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자’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최근 다스는 누구 거냐는 질문에도 “아 몰랑! 내 것 아닌 건 확실해요”로 거침이 없다. 비트코인에 대한 전망도 “아 몰랑!”이고, 청년 실업과 양극화, 새로운 대통령과 북한의 예측마저도, 그리고 트럼프에 관한 어떤 것도 “아 몰랑! 인생 뭐 있겠어”로 처리되지만, 그 백치한 냉담과 허무한 재치가 공감되어 실소를 자아낸다. 그런데 이런 ‘아 몰랑’ 현상이 혹시라도 우리가 너무 숨 가쁘게 달려온 바쁜 세대들이어서, 이를테면 선사와 역사, 원초의 빅뱅에서부터 이족보행의 직립 인간과 첨단의 사물인터넷까지, 나아가 우주와 인공지능을 한꺼번에 섭렵해야 하는 피로감에서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다시 말해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짧은 시간에 치러내면서 소진되어 빚어진 좌절과 우울, 그리하여 백열하게 타버린(burn out syndrome) 자아가 일종의 정보차단과 같이 파고든 또 다른 의식의 파행은 아닐까. 나도 “아 몰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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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혜 부동산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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