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바라 부시 여사와 관계를 맺었던 것은 1984년에서 1988년까지이다. 84년 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 대통령-부시 부통령 후보의 전국 한인 선거참모장과 88년 대선의 부시 대통령-퀘일 부통령 후보의 선거에서는 전국 아시안 총 선거참모장을 하면서 부시 여사과 개인적으로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그 분의 사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부시 대통령은 부인 바바라 여사를 “Bar” 라고 부르면서 부부 사이가 각별했다. 바바라 여사는 첫사랑인 부시 대통령과 가정을 꾸미면서 남편이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후에도 한결같이 ‘가정적인 아내’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백악관에서도 손자, 손녀들이 태어나면 손 양탄자를 만들고 수를 놓으면서 손주들의 출생을 축복하곤 했다.
항상 그 분은 “가정이 원만하면 백악관도 잘 돌아간다”고 하면서 가족 구성원들의 인성교육이나 행복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바바라 여사의 사진을 보면 항상 백발이었는데 자녀들 중에서 두 번째 딸이 3살 때 병으로 죽은 후로 백발이 되자 머리의 염색을 안 하고 그 딸과의 이별을 항상 생각하곤 했다.
바바라 여사는 가정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감각이 남다른 면이 있었다. 선거운동을 같이 다니면서 조용히 옆에서 조언을 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 중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내가 담당한 선거본부의 스텝 중에 아시아 15개국을 담당하는 34명의 선거원들이 모여서 왜 자기가 부시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서 일하는 가에 대해서 각자 의견을 말한 적이 있었다. 부시 대통령과 함께 경청했던 바바라 여사는 아시안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부시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 대통령이 나에게 정치적으로 뭘 원하는가 물었을 때 나는 5월을 ‘아시안의 달(Month of Asian American)’로 선정해 달라고 부탁했고 쉽게 허락이 됐는데 이것은 부시 여사의 조언도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한없이 인자하고 가정적이면서도 엄격했던 그 분의 별세 소식을 들으면서 많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