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기도 전에 손자를 데리고 틈만나면 공원길을 다녔더니 이젠 차고를 향해 손짓을 하고 말은 못해도 봄바람난 처녀처럼 창문을 향해서도 발을 들어 올린다. 보름있으면 한 살이 되는 꼬마라 요즘 초보 걸음마 시키느라 바쁘다. 계단을 오를때면 손을 잡고 발부터 들어 올리는 의사표시가 너무 귀엽다. 아들집은 타운하우스가 밀접해 있는 DC 근처에 있어서 편하긴 한데 요즘처럼 봄향기가 그리울 때는 꼬마를 데리고 공원을 찾는다. 스트롤러를 밀면서 걸으면 숨이 탁 트이면서 상쾌한 기분이 든다.
오늘은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꼬마는 얼굴이 벌게 가지고 우-우 하며 갸름한 눈으로 바람을 즐기며 좋아한다. 앙상한 가지에 적포도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루며 커다란 꽃들을 그림처럼 달고 있는 목련, 하얀꽃나비가 하늘거리는 더그우드, 가지마다 빼곡히 핑크빛 함박꽃으로 온 몸을 장식한 겹벚꽃, 청아한 하늘 햇살 속으로 바람이 불어서 늦게 핀 벚꽃들이 눈꽃처럼 흩날리며 잔디밭과 보도를 연분홍으로 장식하고 있다. 개를 끌고 산책하는 사람, 반바지 차림으로 뛰고있는 청년, 열심히 미끄럼틀을 타는 어린 아기들, 모두가 꽃사이를 날아다니는 벌과 나비처럼 바쁘다. 멀리서 노란 담요로 온 몸을 감싼 할머니를 휠체어에 앉혀서 서서히 밀고 오는 미소 머금은 중년의 여성이 눈에 뜨인다. 며칠 전에 보았던 사람들이다.
휠체어에 기대는 어머니와 정성스레 밀고있는 모습이 너무 다정해보여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어머니가 심각한 병에 걸려있지만, 치료를 거부하고 인생의 마지막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있다고 한다. 노인은 약기운 때문인지 힘이 없어보였고 피곤함이 그림자처럼 스쳤지만, 시종 밝게 보이려는 모습이다. 오늘도 어머니가 좋아하는 벚꽃이 다 지기전에 다시 보러 나온 것이라고 했다. 스위스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시한부 환자면 누구나 겪는 죽음의 5단계를 이야기 했다. 첫번째는 진단이 잘못되었을거라는 부정, 두번째는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하는 분노, 세번째는 생활태도를 바꾸면 병이 나을거라는 협상, 네번째는 우울에 빠지게 되고, 다섯번째 단계에서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상태에 이른다고 한다.
제한된 삶을 슬퍼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고 초연하게 내세를 향해 갈 수 있는 여유, 삶이 나에게 준 것을 거부하지 않는 용기, 인생의 무게를 심판대에 다 내려놓고 절대자를 만날 수있는 담대함, 그렇게 어머니를 보낼 수 있는 마음, 천국에 소망을 둔 그들의 믿음이 부러웠다.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돌보는 그 모습은 봄의 어느 꽃보다 더 아름답게 보였다.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펼쳐지고… 풀옆 공원벤치에 앉아 평온히 잠든 손주를 쳐다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밑을 보니 작은 풀꽃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자연은 스스로 들어가고 나오는 때를 깨달아 안다. 순간순간 흘러간 나의 숨결이 이 공원에서 고요한 물결이 되고 있다. 삶은 언제나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할 뿐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는다. 어떤 인생으로 살 것인가는 온전히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도 각자에게 달려있다. 아침이 밝아오면 주신 하루에 감사하며, 파릇파릇한 봄처럼 꿈과 희망과 사랑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열 때 행복한 하루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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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잔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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