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배추김치를 담갔다. 최근 우리 내외의 식탁에 김치가 찬밥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 잘 익은 김치를 흰 쌀밥 위에 얹어 한 공기 뚝딱 먹어 치우던 일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어느 날 슬그머니 손맛에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내 연수를 헤아려 본다.
젊은 시절 식구들의 건강이 주부의 손맛에서 우러나온다는 일념으로 장바구니 들고 종종 걸음으로 시장에 가면, 언제나 두 팔이 저리도록 채소며 생선이며 값비싼 육류까지 양손에 가득 들고 올 때는 완전 통 큰 손이었다. 남편의 지론대로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면서.
내 눈 잣대로 익숙하게 푸짐한 요리를 만들어 놓으면, 저녁상을 마주한 우리 네 식구의 입이 벌어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때의 뿌듯함이란 만들 때의 수고쯤이야 능히 보상해 주고도 남는 이벤트였다.
나날이 김치냉장고는 김치를 다 채우지 못하고, 냉장실에 들어갈 음식으로 가득하다. 한국 음식은 주부들을 고달프게 한다는 것을 이곳 미국에 와서야 깨달았다. 일회용 조리나 포장된 채소를 많이 사용하는 이웃들과 달리 우리 집은 대부분 채소가 주재료이다 보니 음식쓰레기 양이 단연 압도적이다.
이제는 먹어 줄 식구도 줄고, 그나마 소화를 위해 자주 소식으로 음식을 섭취하려니 아침은 빵과 스프 그리고 야채샐러드로 식단을 바꾸었다. 한 끼라도 한식을 줄이니 삶이 한결 수월하고 주부의 일손도 덜게 된다. 미국에서는 생활 여건상 맞벌이가 주류를 이룬다. 주부에게 주어지는 폭넓은 일자리는 간편한 식생활도 한몫을 한다고 할런지.
좋은 학군이라고 학부형들의 입소문을 타고부터 스쿨버스가 오는 시간이면 엄마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스쿨버스를 기다리며 담소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일터로 출근하는 것이 이곳 주부의 일상이다. 때로는 조부모가 바쁜 맞벌이 부부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이제는 지난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살림살이의 일선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여가시간을 즐긴다. 한때 가부장적인 한국의 남편들에게 공포(?)가 된 유행어가 있었다. 아내가 전기밥통에 밥 가득, 냄비에는 국 가득, 그리고 이것저것 며칠 두어도 변하지 않는 밑반찬들을 준비해 두고 어느 날 갑자기 여행을 떠나 버리는 것을 조심하라고. 하지만 이는 잠시라도 가정주부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어려운 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나이의 주부들 생각은 한결같다. 아이들의 엄마로서 존경받고 남편으로부터 신뢰와 사랑을 받는다면, 가정을 지키는 주부로서 우리의 삶 그 자체를 하나의 보석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나날이 급변하는 요즈음 주부의 모습이 먼 훗날 후손에게 정녕 어떻게 비춰질지. 오늘따라 낭만 속으로 멀어져만 가는 우리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아련히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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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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