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가득한 뒷마당에 들어서자, 나는 마치 옷장 문을 열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선 <나니아 The Chronicles of Narnia>의 ‘루시 Lucy’가 된 듯하다.
올봄은 유난히도 더디 왔다. 2월 말에 튜울립 새싹이 올라온 것을 보았을 때부터 기다리던 봄이 3월엔 다시 추워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게으른 녀석아! 얼른 일어나거라!” 호통이라도 쳐서 깨우고 싶었다. 4월 초까지 눈이 내리고 4월 말이 다 되어서야 봄기운이 들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공교롭게도 나는 출장으로 떠나있었다. 출장에서 돌아오니, 마치 노아의 홍수 때처럼 억수 같은 비가 쉬는 날도 없이 일주일을 넘게 내려 밖에 나가볼 엄두를 못냈다. 그리곤 지난 주말엔 조카의 대학졸업식에 참석하느라 또다시 집을 떠나게 되었다.
지난 몇 달간 급박하게 움직이는 세상 뉴스와 직장 일에 더하여, 몇 주간의 여행 피로가 겹쳐 나는 드디어 오늘 병가를 내기에 이르렀다. 가누기 힘든, 고단에 지친 몸을 침대에 맡긴 채 누워 있었다. 창을 통해 스며드는 햇살이 내게 손짓했다. 나는 짐짓 외면하고 눈을 감은 채 등을 돌려 누웠다. 점점더 눈 부신 햇살이 내 등을 내리쬐었다. 그 햇살에 이끌리어 나는 뒷마당으로 나섰다.
새싹의 연초록이 나온 후 순차적으로 다른 꽃들이 피고 지고 초록이 점점 짙어지는 여느 봄과 달리, 뒷마당은 새싹의 연초록과 진달래, 장미, 호박꽃등등이 모두 어우러져 있었다. 지난 달 말에 베었던 부추는 다시 많이 자라 있었고, 그 옆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청초한 하얀 꽃을 살포시 피운 초록 잎의 식물들이 늘어져 있다. 눈을 들어 키가 훌쩍 자란 과실나무들을 보니, 사과나무와 배나무엔 손톱 크기만 한 열매들이 가득 달려있고 복숭아나무엔 어린아이 주먹만 한 열매들이 간간이 보인다. 복숭아 열매를 가까이 들여다보러 다가서니, 빨간 카디널이 이 나무에서 저만치 날아간다.
새를 따라 움직인 나의 눈길이 홀로 활짝 핀 장미꽃에 머무른다. 이 장미는 재작년 가을 앞마당에 삐죽삐죽 자란 장미가지들을 잘라 뒷마당에 옮겨심은 것들 중 하나다. 그때 대여섯 가지를 꾹꾹 눌러 심어 놓았었는데 그중 둘만 살아남고 그중 하나가 이 꽃 한 송이를 피워냈다. 앞마당엔 여러 장미 나무에 꽃들이 흐드러지게 펴있지만, 이 장미꽃은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에게 그가 남겨놓고 온 장미 한 송이가 특별했던 것처럼. 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지치기한 것을 심어 정성을 들여 물을 주고 들여다본 장미이기에.
문만 열면 들어설 수 있는 내 집 뒷마당인데, 해마다 나는 이곳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작년엔 어느 곳에서 날아왔는지 노란 해바라기가 덱 위에 피었었다. 초록 잎이 솟아났을 때 잡초인 줄 알았는데 점점 쑥쑥 크더니 어느 날 꽃망울을 머금고는 눈부신 햇살 아래 함박웃음처럼 노란 꽃잎을 펼쳤다. 그 해바라기는 내게 고흐의 해바라기보다 더 각별히 다가왔었다. 이 우주 어디에선가 나를 향해 그 씨앗이 다가와 내 눈앞에서 꽃을 활짝 피웠을 때, 나는 잡초라 여겨 성급히 잡아뽑아 내지 않은 것을 얼마나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오늘은 홀로 씩씩하게 핀 빨간 장미가 내게 그런 새로움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카디널이 다시 어디에선가 날아와 새를 따라 움직이는 햇살이 마치 경쾌한 왈츠를 연주하는 듯하다. 나와 함께 뒷마당에 나선 나의 개, 턱스도 부스럭거리는 다람쥐를 쫓아 부지런히 내달린다. 옷장에서 나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 나니아를 발견하고 만연한 미소를 지은 루시처럼, 나는 내 뒤뜰에서 세상의 어수선한 뉴스와 고된 일과를 잊고 두 팔을 벌려 손을 활짝 폈다. 내 손에 햇살이 사뿐히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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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워싱턴 문인회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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