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난히 초봄부터 비가 잦다. 청명하던 하늘도 일시에 세찬 바람이 검은 구름을 몰고 다니더니 끝내 소나기를 퍼붓는다. 황급히 뛰어나가 널려 있는 빨래를 걷는 것도 다반사이다. 짜증스런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다가도 부쩍부쩍 자라는 초목과 새파란 잔디를 바라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씨익 한 번 웃고 만다.
오늘은 동네 전체가 라티노 아저씨들이 잔디를 깎는 굉음으로 소란스럽다. 그들은 비를 흠뻑 맞고 자란 잔디를 깎은 뒤 인도 양 옆을 트리머로 나란히 줄을 세우고 흩어진 잔디의 잔해를 치우며 한 나절이 지나서야 작업이 끝난다. 어느 특정 나라의 이민자를 받아들인다, 아니다를 반복하는 작금의 이민 정책을 논할 수는 없어도, 라티노 아저씨들의 노동은 미국 사회에 여러모로 필요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어깨에 무거운 통을 메고 온 동네를 누비며 잔디 깎는 기계로 밀고 나면 가르마를 탄 듯 대각선 줄이 잔디밭 위에 또렷하다. 오랜 숙련공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다.
나는 그들이 밀고 돌아 간 길을 따라 점검이라도 하듯 산책을 나가면, 갓 벤 신선한 풀 향기에 취하여 한껏 심호흡을 해 본다. 기분이 절로 상쾌해지고 건강은 덤으로 따라 온다. 집에 도착하니 남편이 잔디밭을 손질하고 있다. 앞뜰과 뒷마당을 모두 깎고 나면 녹초가 되는 나이인지라 잔소리를 넘어 쓴 소리를 매번 하게 된다.
겨울과는 달리 뜨거운 여름이 되면 더위를 피해 이른 새벽에 산책을 나간다. 골프장의 스프링쿨러가 넓은 코스를 돌며 물을 뿌리고 있다. 하늘 높이 치솟는 물줄기는 언젠가 스위스 제네바 호수에서 바라본 경이로움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시원하고 통쾌하다. 붉은 해가 떠오를 때쯤, 물에 흠뻑 젖은 잔디밭에 초롱초롱 맺힌 물방울이 아침 햇살에 보석처럼 반짝인다. 잔디 속에 수없이 박힌 영롱한 보석들을 바라보면 마치 부자가 된 양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잔디밭 속에 자라나는 뿌리 깊은 민들레나 클로버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골칫거리 잡초에 지나지 않아 서둘러 뽑아 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클로버 군락 사이로 네 잎이 보란 듯이 빼곡히 얼굴을 내밀 때는 놀라움과 반가움에 함성이 절로 나온다. 키 작은 민들레의 샛노란 꽃도 볼수록 예쁘지만, 클로버꽃 역시 연인이나 아이에게는 꽃반지를 만들어 끼워주고 싶은 예쁜 꽃이다.
학창 시절 교정 연못가 클로버 동산은 친구들과 담소하며 노니는 장소였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찾아 헤매던 네잎 클로버는 나폴레옹의 일화 속에서처럼 나에게는 특별한 ‘행복 초’가 되어 있다. 지금도 두툼한 내 책갈피에는 정성스레 말려진 수많은 네잎 클로버와 곱게 물든 단풍잎이 나이와 상관 없이 소녀의 감성을 고스란히 지니게 하는 듯하다. 젊은 시절 친구들에게 보내는 손편지 속에는 잘생긴 네잎 클로버를 골라 셀로판지로 덮고 예쁘게 장식해 넣어주던 추억도 있었건만.
요즈음 한창 유행하는 ‘아모르 파티’의 노래 가사처럼 나이듦은 필수, 마음은 선택이라고 했던가! 태양이 빛나고 하늘아래 무성한 잡초와 신록을 바라보면 아직도 내 가슴이 뛴다는 사실이 마냥 흐뭇하고 즐겁다. 별들이 사라진 이른 새벽 잔디밭 산책로를 따라 오늘도 가벼운 걸음으로 길을 나선다.
(blog.naver.com/soon-usa)
<
윤영순 우드스톡, MD>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