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문을 닫지 못한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지 않으니까 빨리 닫으라고 딩동댕 울린다. 화장실 문을 닫지 않아 불이 켜져 있고 통풍장치가 계속 울린다.
아내가 문을 빨리 닫으라고 잔소리를 해도 여전하다. 어느 날 아침, 신문을 가져오려고 마당에 나갔더니 차고 문이 열려있다. 전날 밤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차고 문을 내리지 않고 하룻밤을 잔 것이다. 다행히 도난당한 물건은 없었다.
문만 아니라 뚜껑도 닫지 못한다. 얼마 전 약방에 혈압약을 받으러 갔었다. 약사가 봉투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성질이 급한 나는 이 약이 중국제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싶어 ‘미안해요’ 하면서 봉투를 찢고 약병을 꺼내 보았다. 약 모양이 어떻게 생겼나 보려고 뚜껑을 열었다. 약 모양이나 제품회사 명칭으로 보아 말썽을 일으킨 중국제는 아니었다.
약사가 약을 봉투에 다시 집어넣으려는데 약 알맹이가 와르르 카운터 위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은 것이다. 약사는 약을 모두 주워 담더니 선반 위의 새 약병을 찾는다. 뚜껑이 열렸던 병이 마지막 병이었다. ‘내 잘못입니다’ 말하고 나는 그 약병을 가져왔다.
문이나 뚜껑을 닫지 못할 뿐 아니라 바지 지퍼를 올리지 않는 횟수가 점점 늘어난다. 아내가 나에게 ‘시원 하겠습니다’ 말하면 나의 바지 문이 열려있다. 사람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으면 이와 같은 증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 같은 건망증이 치매의 전조가 아니기를 바란다.
문을 닫지 못하는 주제에 기계작동을 끄지 못하는 괴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아내와 같이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고 나오니 자동차의 잔잔한 엔진소리가 들린다. 엔진을 끄지 않은 것이었다. 요즘 나온 차는 열쇠 없이 시동을 걸고 끄기 때문에 엔진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뿐 아니다. 입을 닫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노인들과 담소하면서 부정적인 말, 필요 없는 말을 나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다. 문, 뚜껑, 지퍼와 입을 닫으라는 아내의 조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낸다.
왜 사람이 이렇게 부실할까. 노망을 부리는가. 자책감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야겠다. 노력해도 되지 않으니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아침에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하루도 문단속, 바지단속, 입단속을 잘 하고, 현실에 충실한 노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운전대를 잡으면 운전에만 전념하게 하여 주옵소서.
차고 문을 내릴 때도 자기암시를 한다. ‘나는 지금 문을 내리고 있다.’ ‘나는 지금 문을 내리고 있다.’ 문이 내려오는 것을 머릿속에 입력한다. 덕분에 집을 떠나서 한 골목을 지난 후 차고 문을 닫지 않았나 의심이 생겨 다시 집에 와서 확인하는 헛수고를 덜게 되었다.
잠들기 전에 아침의 기도대로 생활했는지 반성해본다. 문단속과 바지단속은 어느 정도 진전이 있지만 입단속은 잘 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입을 나불거린다. 어디서 다음과 같은 표어를 본 기억이 있다. ‘개구즉착(開口卽錯)’ - 입을 열면 착오를 일으킨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어야겠다.
치매라는 괴물이 몇 년 후 90이 될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나는 그 괴물의 만만한 먹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문단속, 바지단속, 입단속과 운동, 인터넷 바둑, 독서와 수필 그리고 신앙으로 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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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현 전 미 국방군수청 안전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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