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나를 출산하던 즈음에 모유수유는 권장되지 않았다. 분유회사의 공격적 마케팅과 서구 생활양식의 대중화가 맞물리면서 모유수유는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고 이러한 한국사회 분위기는 2000년대가 되서야 변화하기 시작했다.
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던 즈음에는 모유수유가 적극 권장되었고 사회적으로 환영받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여러 가지 이유와 상황으로 아이에게 분유수유를 해야 하는 보호자들의 입지를 좁게 만들었다. 사랑이 부족해서 혹은 정성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유수유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와 내 아이가 태어나던 사이에 올림픽이 일곱번, 월드컵이 여덟번 열렸다. 이 긴 시간동안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뿐이다.
개인의 상황과 선택이라는 것은 극히 개별적이다. 그 상황에서는 그러한 선택이 그 사람에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왜 이 지점에서 끝나지 못하고 나와 다른 선택지에 있는 사람들을 비난한 후에야 끝이 나는 것일까.
불안. 아마 불안 때문일 것이다. 나도 내가 한 선택이 옳은 것인지 정말 이 선택이 최선인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누군가를 본다. 내가 맞다면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선택을 했을텐데, 그가 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한 인간은 몸부림을 친다. 그 몸부림이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이다. 불안을 떨쳐내고 나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처절함에는 힘이 들어간다. 안타깝게도 그 힘은 종종 파괴력으로 발산된다.
내 안의 불안을 바라보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내 불안과 대면하는 선택보다는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상대방을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비교적 쉬운 선택을 한다. 문제는 이 쉬운 선택이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내 아이들이 부모가 되고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모유수유다, 분유수유다 하는 선택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든 이것이 나와 내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하는 종류의 선택을 하면 좋겠다. 완전하지 못한 선택일지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불안해도 그 선택을 한 스스로를 믿고 다독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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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재 / 오클랜드 도서관 한국어섹션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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