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오기 전까지 나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96년 영국에서 영어 연수를 받은 후엔 교사들에게 영어 교수법을 강의했고 교과서 편찬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항상 ‘부족함’이 느껴져 2001년 워싱턴DC A대학원에 유학하게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땅에서의 삶이란 불타오르는 학구열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다. 우선 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입주 가능 베이비시터를 수소문한 결과, G교수 댁에서 4명의 아이를 돌봐주고 숙식을 해결했다. 강의가 저녁 시간이라 낮에는 부족한 학비 마련을 위해 동네 아이들 베이비시터, 레스토랑 종업원 일까지 늘 파김치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더 힘들었던 건 학업으로 인한 정신적인 스트레스였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토론이 주를 이루는 강의실에서 나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반벙어리에다 구석에 엑스트라로 앉아있는, 그저 실력 없고 가난한 유학생일 뿐이었다.
폭설주의보가 내린 어느 늦은 겨울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 근처에서 갑자기 꺽꺽 토하며 ‘다 포기하고 그만 한국으로 돌아갈까?’라고 생각했다. 매서운 눈발들이 온몸을 휘갈기는데, 바로 그때 내 등을 따습게 어루만지는 손길과 함께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라는 음성이 들렸다.
졸업하기 1년 전, 마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LA에서 열리는 ‘국제 영어 학술 대회’를 앞두고, TESOL 협회 임원이셨던 우리 과 교수님이 나를 추천해주셨다.
세계 영어 교육 전문가들 앞에서 교수법을 논하라고? 이제 막 반벙어리 신세를 면한 내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공개수업 때마다 나를 칭찬해줬던 교수님의 격려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꼬박 6개월을 준비한 결과 ‘비원어민으로서 효과적인 영어 교사가 되는 방법’이란 제목으로 2시간의 발표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 바로 메릴랜드 몽고메리 칼리지에 취직이 되었다. 이 대학에서 벌써 16년째 영어를 가르치면서, 또 몇 해 전부터 A대학원생들에게 ESL 실습 과목을 가르치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처럼 어려운 처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 서로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도록 오래전부터 내 삶을 준비해오신 분이 존재한다는 걸. 그분의 도움으로 쏟아붓는 땀방울이라면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뚫을 수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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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 게이더스버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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