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이라는 명찰을 달고 산 지 4년이 지났을 때, 나의 몸무게는 39kg까지 빠져 있었다. 당시 한국에 살고 있던 나는 반복적인 출장과 일 년 전부터 큰 예산을 들인 프로젝트 준비에 지쳐 있었다. 만삭의 몸이던 두 팀원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이유 모를 책임감마저 들어 심리적으로도 심히 날카로운 시기였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었고, 겨우 잠이 들었다가도 다시 벌떡 일어나 새벽 사이 나에게 온 이메일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일을 사랑했지만, 일보다 더 무거운 압박감과 불안함도 함께 떠안아야 했다. 결국 어떤 음식을 먹어도 온몸에 붉은 알레르기 반응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번아웃(burnout)을 인정하고 짧은 병가를 택했다.
물을 마시는 것도 잊고 한참을 혼자 침대에 누워서 벽에 그려진 무늬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잔소리 말고 얼른 튀어나오라는 언니의 문자를 받았다. 둘이서 최신 개봉한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보면서 배를 잡고 웃고, 혀가 얼얼해지는 낙지볶음을 시켜놓고 영양가 없는 수다만 몇 시간을 떨었다. 또 어떤 날에는 친구들이 분식을 두 손 가득 싸 들고 찾아와, 셋이서 깔깔 웃으며 제일 쓸데없다는 연예인 걱정을 실컷 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에는 다시 언니가, 그 다음 날에는 다시 친구들이 그렇게 나를 가라앉지 말라며 물장구를 쳐 주었다. 나는 나의 번아웃을 그렇게 버텼다.
폭풍을 만났을 때 함께 걸어주는 인연이 있다. 그들은 갑자기 내리치는 소나기에 미리 챙겨온 우산을 펼치듯, 정확한 타이밍에 우리에게 나타나 벅찬 안도감을 준다. 아무리 내치려 해도 내쳐지지 않고, 멀어지려 했다가도 고무줄처럼 한순간에 찰싹 달라붙는다. 영문을 몰라도 함께 웃고 울어주며, 꼬불꼬불하고 매서운 서로의 길을 고민 없이 함께 걸어가 준다. 어쩌면 삶의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름길은 빠른 성공이 아닌 바로 깊은 인연일 것이다. 여덟 살에 처음 만나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주는 나의 친구들이 그랬고, 나보다 열 살이 많은 나의 언니가 그랬다. 나의 첫 직장 동료가 그랬고, 산책하다 우연히 알게 된 동네 이웃이 그랬다. 소울메이트. 그 이름이 거창할 뿐, 사실 우리가 외로움에 갇힐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문을 두드리는, 깊은 인연들 말이다.
<이수진(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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