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터지자 은행권의 방만한 대출 관행이 도마에 올랐다. 미국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정부의 암묵적인 보증을 믿고 위험한 대출을 무릅쓴 은행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했다. 장밋빛 미래에 현혹된 금융사들의 방만한 투자가 거품의 소멸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크루그먼은 안이한 영업 행태에 젖어있던 아시아 은행들을 싸잡아 ‘팡글로스(Pangloss)’라고 비판했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 빠져 위기를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다.
팡글로스는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 등장하는 비상식적이며 과도한 낙관주의자다. 볼테르는 당시 팽배했던 낙천적 세계관을 조소하고 사회적 부정·불합리를 풍자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 팡글로스는 그리스어로 ‘모든’을 뜻하는 ‘pan’과 ‘혀’를 가리키는 ‘gloss’의 합성어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박식한 사람’이란 뜻이다. 박사로 등장하는 팡글로스는 순진한 청년 캉디드를 가르치면서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에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캉디드는 전쟁과 질병·고문·폭행 등 온갖 비관적인 일을 겪은 후 마지막 순간에 “눈앞의 밭을 가꾸는 데나 힘쓰자”며 현세주의적 조언을 건넨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경제 위기론을 부정하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를 겨냥해 “총리가 목적지를 유토피아로 그리고 있다”며 “현실감각을 잃은 팡글로스”라고 조롱했다. 전국의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져 ‘주유대란’이 빚어지는 데도 존슨 총리가 5일 방송에 출연해 “영국 경제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은 견실한 경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며 인플레이션 우려마저 일축했다. 이는 일자리 개선, 경제 호전을 되뇌며 ‘묻지마 낙관론’으로 일관하는 우리 정책 당국과 닮은꼴이다. 하지만 책임 있는 정부라면 근거 없는 장밋빛 희망만 얘기할 게 아니라 국민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인플레이션 위기 등을 직시하고 방파제를 제대로 쌓아야 한다. 정부는 경제의 먹구름을 보고도 외면하려 하지 말고 늘 최악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우산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정상범 /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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