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릴없이 숫눈발 속에 다시 서노니 초경의 비린내 풋풋한 순수함이여. 너의 심부에 언제나 깊고 어둔 발자취를 남겼으되, 이 눈길 위에 다시 새로운 나의 발자국. 오오 편편으로 흩어지는 하늘의 전신이 흰 북소리 둥둥 울릴 때 과거가 어찌 남김없이 용서받고 기억들이 어찌 어김없이 위무 받느뇨.
모든 만남은 언제나 영원한 첫번째 만남이듯 흰 눈썹 부비며 낯선 미명의 거리를 가노라. 미진한 기억 속에 흰 북소리 낮게 질주하고 빈 나무 등걸은 바람에 부풀면서 시간 바깥으로 무수한 기억의 휴지부를 날려 보내도다.
해마다 한차례 심령 속에 하늘이 갈갈이 찢어지나니 묵은 기억의 모서리를 이지러뜨리며, 미지의 경험 속에 나를 미끄러뜨린다. 새로운 시간의 숫눈길 속에 그날의 풋풋한 순수로 유입하리라.
김은자 ‘초설’
첫눈은 대개 가까스로 내린다. 한 점 두 점 느리게 흩날린다. 망설인다, 지우개를 든 화가의 손길처럼. 마침내 결심한 듯 쏟아지는 폭설은 꽃피던 봄을 지우고, 잎 푸른 여름을 지우고, 화사한 가을을 지우고, 당신이 걸어온 계절의 모든 발자국들을 하얗게 지워버리고야 만다. 남기고 싶었던 성취도, 지우고 싶었던 과오도 가뭇없어 당신은 아득하고 후련하다. 모든 과거가 용서 받고 모든 기억이 위무 받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은 날마다 새로운 숫눈의 도화지를 받는다. 당신은 어제 멈춘 발자국에서 오늘 첫발을 떼어 새겨야 한다.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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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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