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를 세운 유방에게는 소하라는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전쟁에서 보급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한 사람이다. 유방이 대군을 이끌고 항우와 싸워 허구헌날 참패할 때마다 흩어진 병력과 물자를 다시 추스르고 물자와 지원병력을 보급함으로 끝내 천하통일을 이루게 했다.
우리나라는 면적의 70%가 산악지대라 6·25 당시 전투 물품 보급에 어려움이 많았다. 미군은 보급 운반을 위해 한국에 인력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26일 긴급명령 제6호를 내려 민간인을 징발해 한국노무단 소위 ‘지게부대’를 탄생케했다. 급조된 그들에게는 계급도 군번도 군복도 주어지지 않았다.
지게부대원들은 포탄과 식량을 40∼50kg 짊어지고 가파른 고지로 올랐다. 전투가 치열할 때는 잠 한숨 못 자고 포탄을 날랐다. 걸으면서 졸다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지게부대원들이 포화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른 것은 포탄만이 아니었다. 하산할 때는 부상자와 시체를 호송했다. 한국동란의 판도를 전환한 다부동 전투에서 무명옷만 입고 펼친 그들의 활약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뒷받침이 됐다.
지게의 모습이 마치 알파벳 A를 닮았다고 해서 유엔군은 이들을 ‘에이 프레임 아미(A frame army)’라고 불렀다. 이른바 ‘A-특공대’다. 미8군 소속 유엔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은 지게부대가 없었으면 미군 10만 이상의 추가 파병이 필요했을 거라 말했다. 35∼45세 남성으로 제한했지만 실제 노무단에는 10대부터 60대까지 있었다는 참전용사의 증언이 있다. 징집된 인원이 30만 명이고 사상자와 실종을 합한 숫자가 만 명에 가깝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도 서울 길가에서 지게꾼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짐을 날라주고 품삯을 받는 그들을 많은 사람들이 업신여겼던 것 같다. 혹시 그 중 6.25 당시 지게부대원이었던 사람을 하대한 것은 아닐까? 계급도 군번도 군복도 없이 나라를 지킨 지게부대는 우리나라의 소하요 잊혀선 안 될 구국영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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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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