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차는 어른이 차리고 나서서 길을 나서는 것을 높여 일컫는 말이다. 행차는 특히 왕이 온천에 가거나, 무덤을 참배하거나, 혹은 타국의 손님을 영접하기 위해 궁궐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임금의 행차는 유독 요란해 친위대의 삼엄한 경호 속에 호위무사가 임금의 가마를 옆에서 호위하고 궁궐을 나가고 들어온다. 바로 뒤에는 악사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행차를 알리는 연주가 한바탕 소란스럽게 펼쳐지는 것이다.
마치 북한 김씨 일가의 행차같은 느낌일까. 조선의 효자임금으로 알려져 있는 정조의 경기도 화성 행차를 담은 병풍이 있다. 1795년의 화성행차를 세세히 묘사하는데, 백성들이 굶어죽던 말던 전제군주의 기분을 위한 화려하고 규모가 큰 의장 행차의 전형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들이 행차하는 경우도 요란스럽기는 마찬가지. 항상 좋은 일로만 행차하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통령이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도 감옥행 에스코트 행차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6년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초구 서울지방검찰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도로를 메운 차량행렬이 생각난다. 박 전 대통령은 2017년 탄핵에 이어 구속후 수감되는 수모를 겪기 위해 수십대의 검은색 차량이 줄을 이어 행차아닌 행차를 했었다.
아주 생소한 광경이었는데, 이번에는 미국에서도 같은 광경을 TV 생중계로 보게 되었다. 이른바 트럼프 머그샷을 위한 차량행렬이었다.
지난달 24일 벌어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수감 일지를 살펴보자. 트럼프는 최근 4번째로 형사 기소되는 수모를 겪었는데, 조지아주 구치소에 잠시 수감되기 위해 자가비행기로 이동했다.
뉴저지주 베드민스터 골프 클럽에서 전용기를 타고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해 저녁 7시 반경 풀턴 카운티 구치소에 자진 출석했다. 그 때 검은 차량들이 떼를 지어 행차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트럼프는 도착과 함께 지문과 얼굴이 나오는 머그샷을 찍었다. 조지아주 대선투표 결과를 뒤집으려 압력을 행사한 혐의다.
물론 아주 짧은 시간 구치소에 머물면서 얼굴이 형사기록에 올라가는 머그샷만 찍고 나왔지만, '풀턴 카운티 구치소'라는 곳은 아주 열악한 상태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악명 높은 곳이다. 트럼프는 풀턴카운티 구치소에서 20여분만에 석방돼 긴 차량행렬과 함께 다시 자가비행기가 있는 공항으로 이동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수감자 번호는 ‘p01135809’로, 범죄혐의기록에 따르면 키는 190㎝, 몸무게는 97.5㎏였다. 기존에 이미 세 번의 형사 기소를 당했지만 전직 대통령 예우로 머그샷 촬영을 면제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법치주의 미국에서 대배심제도는 핵심중의 핵심, 일반 미국인 배심원들이 가결하는 시스템이므로 아무리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비켜갈 수가 없는 것이다.
과연 트럼프가 내년 대선을 통해 화려하게 불사조처럼 부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사면복권은 되었지만 힘없는 전직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될까.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1차 토론회는 머그샷찍기 전날인 지난달 23일이었다. 그런데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날 토론회에 불참했었다.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현재 2위를 달리고 있는 비벡 라마스와미와 니키 헤일리 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등이 참여했지만, 트럼프없는 토론회는 맹탕일 수밖에 없다.
이미 트럼프는 비벡 라마스와미를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으니 대략 공화당의 대선 준비 구도는 그대로 정해져버린 것 같다. 트럼프의 화려한 부활 차량행렬을 또 보게 될까.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고 정치는 인생만큼이나 웃기는 짬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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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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