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간 이어진 중국의 개혁개방은 우리 조선족들의 삶에 깊고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에 놓인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개혁개방의 거센 물결에 휘말려 숨 돌릴 틈도 없이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변화의 속도에 맞춰 자신을 끊임없이 조정하며 사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제 겨우 적응됐나 싶더니 어느덧 육십을 넘기게 되었다.
우리 세대는 자본주의라는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가정과 자녀를 뒤로하고 돈을 좇아 흩어져 살아간 우리들. 어떤 이는 부자가 되었지만, 또 어떤 이는 가정과 건강을 모두 잃고 돌아올 길조차 막막한 처지가 되었다.
힘들게 돈을 벌어 가족에게 보냈지만, 남편이나 오빠가 그 돈을 모두 탕진해버린 사례. 오랜 세월 외국에서 고생하며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이야기. 부부가 몇 년 만에 집에 돌아갔지만, 그 사이 아들이 비행 청소년으로 변해버린 경우⋯.
이 모든 사연들은 자본주의에 익숙하지 않았던 50~60세대 우리 조선족들이 맞닥뜨린 현실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치 카지노 도박판에 던져진 아이들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김택씨 또한 이 아픈 사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사람이었다.
김택씨는 미국에 혼자 건너와 식당 일을 전전하며 힘겹게 생계를 이어갔다. 그동안 딸은 이미 출가했고, 가정은 깨져 아내는 떠나버렸다. 그는 홀로 남았다.
설상가상으로 2년 전 간암 진단까지 받으면서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건강마저 무너졌다. 친척도, 의지할 가족도 없는 그는 조선족교회와 조선족봉사센터, 그리고 몇몇 지인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생명을 연명해왔다. 결국 지난 9월 29일, 이국땅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조선족교회와 조선족봉사센터에서는 그의 장례식을 대신 치러주었고, 지난 11월 18일 봉사센터의 주광일 회장과 김광섭 이사가 그의 골회함을 연변으로 부쳐보냈다.
이로써 십여 년간 이국땅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며 고군분투했던 김택씨는, 죽어서라도 고향에서 영면하게 되었다.
조선족동포회, 조선족봉사센터, 조선족교회 등 조선족 단체들은 이처럼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
김택씨의 삶과 죽음은 우리 공동체가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유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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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열/조선족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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