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검사는 갑오개혁 이후인 1895년 ‘재판소구성법’ 공포로 태어났다. 이 법은 재판과 행정을 나누고, 검사는 재판소 직원으로 수사와 기소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일제 강점기 때 검사 수사권이 점점 강해지는데, 1912년 조선 총독부는 검사에게 20일 이내 피고인 구류를 허용하는 ‘급속 처분권’ 등을 부여한다. 이는 일본 법에 검사 ‘급속 처분’이 등장한 것보다 10년 더 빠르다. 검사의 수사·기소권 자의적 행사는 식민지 통치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 해방 후 미 군정은 영미법에 따라 수사와 기소 이원화를 도입하지만, 실제로는 일제에 협력했던 경찰을 믿지 못해 검찰을 주된 사법파트너로 삼았다. 반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무장 병력을 갖춘 경찰을 중용하면서, 경찰이 검찰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48년 여수·순천 사건 당시 박찬길 검사가 무고한 민간인을 사살한 경찰을 기소하자, 경찰이 반란군 누명을 씌워 박 검사를 총살했다. 하지만 이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는데도, 이 대통령은 “불문에 부치라”는 지시를 내렸다.
■ 고 박종철 고문치사를 다룬 영화 ‘1987’은 경찰이 검찰보다 위세가 강했던 것이 군부독재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박종철의 사인이 수상해 부검하려던 최환 공안부장검사가 이를 막는 박처원 대공수사처장(치안감)에게 쩔쩔매는 모습은 오늘날 상상하기 힘들다. 지금의 검찰 전성시대는 역설적이게도 군사정권을 지키던 보안사와 국가정보원 권력이 사라진 민주화 이후에 막을 열었다. 98년 김대중 대통령은 법무부를 찾아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선다”고 했다.
■ 검찰 개혁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사직서를 낸 검사가 40명에 달한다.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뒤숭숭했던 2022년 146명 사퇴 기록을 넘어서는 추세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검사 영입에 열을 올리던 대형로펌과 대기업들이 검사 출신 채용에 소극적으로 돌아선 분위기다. 검사의 위기는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 대통령에서 비롯된다. ‘130년 검사 권력’이 정치권력과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정치권력이 되면서, 결국 개혁의 대상이 됐다.
<정영오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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