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5일 두다멜 지휘 아래 조성진이 협연한 라벨, 8월12일 엘림 첸이 지휘하고 제임스 에네스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8월19일 다니엘 하딩 지휘로 다닐 트리포노프가 협연한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8월26일 기드레 슐레키테 지휘에 츠지이 노부유키가 협연한 베토벤. 지난 8월 매주 화요일마다 네 번의 할리웃보울 무대를 보며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그 생각은 매주 확신으로 변해갔다. 바로 ‘편견이 깨지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그동안 없었던 현상은 아니지만, 올해는 더욱 확연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LA 필하모닉이 주최하는 할리웃보울 시즌은 보통 6월에서 9월 사이 약 14주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특히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은 전통적 레퍼토리, 예컨대 라흐마니노프나 베토벤 등 널리 알려진 협주곡과 교향곡을 중심으로 한 클래식 음악회가 열린다. 올해도 이 틀은 변함없었지만, 그 무대를 채운 주역들의 세대교체가 눈에 띄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노부유키 등 아시안의 활약, 그리고 지휘자 엘림 첸과 기드레 슐레키테 등 여성 지휘자들의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들은 더 이상 특별한 수식어가 필요 없는 연주자이자 지휘자로서, 세계 최대 규모의 야외 클래식 페스티벌 중심을 당당히 차지하는 시대를 열었다.
조성진은 베토벤이나 라흐마니노프 대신 라벨을 선택해 연주했다. 그것도 색이 확연히 다른 두 곡을 두다멜과 협연했다. 최근 발매한 음반을 계기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음반 홍보를 넘어 예술가로서 감성을 여유롭게 풀어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했다. 노부유키는 베토벤을 놀라울 만큼 투명하게 들려주었고, 앵콜로 자주 연주하는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에서는 예년과는 또 다른 원숙함을 전해 베토벤 못지않은 갈채를 받았다.
많은 여성 지휘자들이 활동성의 이유도 있고 차별을 의식하기도 해서 중성적인 복장을 선택하는 편인데, 첸은 오히려 여성성을 숨기지 않는 의상을 택했다. 그것은 단순히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과 지휘의 권위가 더 이상 남성적 외양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편견을 넘어서는 가장 강력한 방식은 스스로의 자연스러움을 당당히 드러내는 것임을 그녀는 무대에서 증명했다. 트리포노프 역시 라흐마니노프에서 압도적인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그는 두다멜을 뛰어넘는 리더십으로 오케스트라를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열정으로 이끌었다.
이들의 출생지는 한국, 일본, 홍콩, 러시아 등 제각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무대의 중심에서 보여준 모습은 단순히 개별 스타의 성공이 아니라 세계 무대가 점점 하나가 되어 가는 흐름을 증명하는 듯했다. 해마다 이 축제에서 베토벤이나 라흐마니노프는 자주 무대에 오른다. 관객에게는 익숙한 보증수표 같은 레퍼토리이기도 하지만, 연주자들에게는 오히려 냉혹한 시험대가 되기도 한다. 모두가 아는 곡이기에 감동을 주는 것도, 남다른 해석을 보여주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아시안 연주자들이 서양의 정통을 연주한다면? 물론 검증 받은 연주자들이기에 초청받은 것이겠지만, 시작은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언어로 해석해내는 이들의 모습은 더 이상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클래식 음악계의 중심임을 보여주었다.
한국인으로서, 아시안으로서 괜히 뿌듯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국 음악 평론계의 반응과 공교육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뉴욕타임스, LA타임스 같은 곳에서는 무대의 다양성과 관객 감소 문제에 대해서는 자주 논쟁하지만, 아시안 파워를 대놓고 강조하지는 않는다. 긍정적으로 보면 인종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는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려는 시선일 수도 있다.
테크닉이나 예술성이 뛰어난 무대를 바라보며 동시에 떠오른 것은 정작 미국 아이들의 현실이었다. 2019년을 기준으로 Arts Education Data Project(AEDP)가 발표한 가장 최신의 미 전역 예술 교육 현황에 따르면, 통계상으로는 90% 이상의 학생이 음악 교육에 접근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밴드나 합창단 같은 선택 과목이나 방과후 활동을 포함한다. 즉, 초등학교 저학년을 지나면 정규 교과 속 음악 수업은 거의 사라지고,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음악 감상 능력조차 길러지지 않는다. 결국 지역 재정에 따라 악기를 만져보거나 구경할 기회조차 없는 아이들이 생기고, 이는 미국 사회의 문화적 불평등을 고착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이 활약하는 무대 아래에서 미래의 관객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음악이나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접할 수 있는 기회다. 지역에서 열리는 작은 연주회나 전시라도 아이들이 자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투자다. 앞으로의 교육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AI를 따라잡기 어려운 영역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극적인 창의력과 감성, 예술적 경험만큼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고유한 권리다. 연주법이나 음악사를 배우지 않더라도, 실제 무대를 접하며 감동을 느끼고 상상력을 키우는 경험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주말 무대는 주로 영화음악, 뮤지컬, 팝 심포닉으로 채워지는 반면, 클래식 연주회는 평일의 일부 공간으로 밀려나고 있다. 관객 확대를 위한 전략이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클래식 스스로의 위상을 낮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어떤 장르의 음악이든 클래식을 모른다면 잠시 눈길은 끌 수 있을지 몰라도 역사에 남기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클래식은 여전히 시험대이자 정점임을 보여주는 힘을 갖고 있다. 화요일 네 번의 무대가 빛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무대들은 단순한 여름 음악 축제가 아니라, 클래식 음악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만의 감성을 동시에 비추는 풍경이었다. 언젠가 비평계에도 그 변화를 해석할 더 다양한 목소리와, 교육 현장에도 예술 경험을 보편화하려는 노력이 더해진다면, 우리는 더욱 풍부하고 진실한 예술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건네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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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아 문화 칼럼니스트 / YASMA7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