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세 협상 속 ‘외환 폭탄’
▶ 미 요구 3500억불 현금 투자시
▶ 한외환보유고 600억불 수준 ↓
▶ 외환위기 직면할 가능성 높아져
▶ 트럼프, 동맹·우호국을 ‘서열화’
▶ 한일에는 막대한 현금 유출 강요
▶ 관세 협상의 정치적 제물 삼으려
▶ 환율 1400원 돌파 등 위기 상황
▶ 우선 목표는 무제한 통화스와프
▶ “관세 버티며 상호이익 협상을”
한국과 미국이 상호관세 협상 타결을 ‘선언’한 지 두 달이 되어가지만 3,500억 달러(약 488조5,650억 원) 대미 투자 관련 후속 협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킨 일본과의 합의 방식 수용을 강하게 압박하는 반면 한국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협상을 강조하며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을 요구하는 등 아직은 버티는 중이다. 우리 정부가 3,500억 달러 후속 협의에 신중한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폭탄’이 자칫 ‘외환폭탄’으로 비화할 수 있어서다. 미국 요구대로 외환보유고(약 4,160억 달러)의 84%가량이 3년 내에 현금으로 빠져나갈 경우 원화 가치 급락과 투기자본의 집중 공격으로 경제 전반에 심각한 충격이 가해질 수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밀고 당기는”(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협상으로 이익의 균형에 다가가야 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25% 상호관세 수용이 더 나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요구는 기본적으로 ‘강탈’에 가깝다. 당장 사상 최대였던 지난해 대미 무역흑자(557억 달러)의 6배 넘는 돈을 3년 안에 투자하라는 건 그 자체로 무리다. 투자처를 미국이 결정할 테니 45일 내에 자금을 이체하라는 것이나 한국이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관세를 25%로 환원한다는 것도 억지다. 원금 회수 때까지는 투자수익을 5대 5로 나누다 이후엔 90%를 독식하겠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것 하나 상호이익을 전제한 ‘협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지난 7월 말 관세 협상 막바지에 우리 정부가 올해 예산의 70%에 해당하는 막대한 투자액 요구를 수용한 건 서로의 ‘필요’와 ‘감당’을 조율할 여지가 있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업과 반도체 등 미국 측 필요 분야 중심으로 민간기업 투자와 미국 현지 금융 조달에 정부의 대출 보증 등을 묶는 10~20년 중장기 프로젝트라면 당장의 버거움은 감내할 만할 거라 판단했음직하다.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사실상 0%이던 관세를 일방적으로 올리는 것을 수용한 만큼 무도하기까지 한 요구가 계속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을 것이다.
이른바 ‘조지아 구금 사태’로 국내 여론이 악화하던 차에 미국 싱크탱크 경제정책연구센터(CERP)의 딘 베이커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분석글이 화제였다. 트럼프 행정부가 멋대로 쓸 수 있는 거액의 투자금을 바치느니 25% 관세를 유지하되 국내 수출 기업을 지원하는 게 더 유리하다는 조언이었다. 그는 관세 인하 시에도 수출 증대 효과 불확실, 거액의 대미 투자에 따른 수익 구조 불투명, 정책 일관성을 뒤트는 트럼프의 변심 등을 지적했다. 진보적 경제학자의 눈에 트럼프의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요구는 명백한 강압으로 비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3,500억 달러 투자 관련 억지 요구는 일본과 체결한 5,500억 달러(약 770조3,300억 원) 대미 투자 양해각서(MOU)를 준용하고 있다. 투자 대상 선정과 자금 이체 및 투자 시한, 수익 배분 방식, 합의 불이행 시 보복 조치 등이 모두 그렇다. 우리 정부는 미국 측에 일본과는 상황과 조건이 다름을 설명하며 대안 마련에 고심 중이다. 그런데 국내 보수진영 일각에선 자동차산업의 경쟁력 저하를 들어 조기 MOU 체결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지금의 MOU로도 최소한 트럼프 2기 임기를 버텨낼 여력이 있는 데 비해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일본의 외환보유고(1조2,400억 달러)는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이고, 미국 국채 보유액(1조1,400억 달러)은 세계 1위다.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 협정도 맺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5,500억 달러의 상당 부분을 통화스와프로 충당하거나 만기 도래 미국 국채로 조달키로 했다. 일방적으로 무릎 꿇은 MOU로 평가받지만, 곳간의 여유를 업고 일정 부분 배수진도 친 것이다.
이와 달리 한국은 전체적인 경제 규모, 외환보유고, 미국 국채 보유액 등에서 일본에 한참 뒤진다. 당장은 미국으로부터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도 거절당했다. 현재로선 미국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할 경우 외환보유고가 600억 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외환위기로 내몰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진보성향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차라리 25% 관세를 부과받는 게 낫다는 한탄과 분노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트럼프의 ‘동맹 서열화’ 이중잣대
트럼프는 관세폭탄을 들고나오면서 동맹·우호국 간 경쟁 분위기를 조성했다. ‘세계 최대 소비시장’을 놓치지 않으려는 무역 상대국들은 조금이라도 더 낮은 관세를 목표로 미국에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해야 했다. 무역 의존도가 높고 대외 충격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가들은 ‘패배자 경쟁’에 내몰렸다. 이제 트럼프는 서서히 동맹·우호국을 ‘서열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은 유럽연합(EU)으로부터 6,000억 달러 투자와 3년간 7,500억 달러 상당의 미국산 에너지 구매를 약속받았다. 액수만 놓고 보면 한국이나 일본보다 부담이 커 보이지만, 대미 투자는 구속력 없는 기업 자율협약이고 에너지 구매 목표치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반면 한국과 일본에는 단기간에 막대한 현금 유출을 강요하고 있다. 아시아 동맹국에 대한 명시적인 차별이자 불공정 행태다.
이는 트럼프의 정치적 입지 구축과 예의 패배자 경쟁 유도와 관련돼 있다. 개별 국가들의 이해관계 조정이 필요한 EU와의 협상은 정밀한 전략을 수반한 시간싸움이다. 트럼프로선 선언적이고 상징적인 승리 이상을 얻기가 어려운 상대인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과 일본은 패배자 경쟁에 제 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선 인도와 브라질 사례까지 포함해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시각이 투영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사실 트럼프의 동맹 서열화 행태는 관세 협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이스라엘의 카타르 공습이 단적인 사례다. 카타르는 미국 방위산업의 큰 고객 중 하나이고 미군 중부사령부가 주둔 중인 주요 비(非)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이지만, 트럼프의 ‘이스라엘 우선주의’ 앞에선 미사일 세례를 감내해야 했다.
조지아주 감금 사태는 시점상으로 미국이 3,500억 달러 투자 서명을 받아내려는 충격 요법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설령 우연이었을지라도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사태 와중에 일본 사례를 언급한 데에선 한일 양국을 관세 협상의 제물로 삼으려는 트럼프의 의지가 투영됐을 수 있다. 우리로선 전체적인 투자 규모도 부담스럽거니와 미국의 강압을 마지못해 수용할 경우 감당하기 어려운 후과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최근의 금융·외환시장 상황은 심상치 않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달러인덱스 100 이하 유지, 경상수지 흑자 지속 등 두드러진 원화 약세 요인이 없는데도 원-달러 환율이 한 달여 만에 1,400원을 넘어선 것이다. 기업의 대미 직접투자와 개인·기관의 미국 증시 투자가 늘었다지만, 그보다는 관세 협상의 불확실성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외환시장에선 미국의 압박이 대규모 달러 유출 가능성으로 읽히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한국은행도 우리 금융·외환시장이 신흥국 평균보다도 대외 충격에 민감하고 취약하다는 분석 보고서를 내놓았다.
1997년 외환위기는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상징한다. 그런데 외환보유고가 단기간에 300억 달러까지 줄어든 과정을 전후로 월가 투기자본의 조직적이고 집요한 공격이 있었다. 그 중심에 있던 골드만삭스 출신 미국 재무장관은 한국에 대한 백악관의 금융 지원을 막았고, 일본은 한국 측 채권을 서둘러 회수했다.
공교롭게도 현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통상분야 수장들도 월가 출신이다. 일본에선 ‘여자 아베’의 차기 총리 가능성이 거론된다.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협상을 둘러싼 안팎의 여건은 녹록지 않지만, 외환위기를 피하고 경제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는 타협의 대상일 수 없다. 이를 위해선 무제한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이 출발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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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대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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