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완박 이후 전담재판부 설치 논의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 정치가 보여주는 일련의 제도 변화는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문제의 핵심은 개별 정치인의 유무죄가 아니다. 특정한 사법 환경 변화가 반복될 때, 그것이 헌법이 설계한 권력 분립과 법치주의의 원칙을 훼손할 위험은 없는가 하는 점이다.
검찰 권력에 대한 개혁 요구 자체는 한국 사회에서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온 정당한 문제의식이다. 과도한 수사 권한 집중, 정치적 중립성 논란은 개선되어야 할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개혁이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제도의 변화가 특정 개인이나 사건과 결부되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법은 일반성과 추상성을 생명으로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2조가 보장하는 적법절차의 원칙은 결과 이전에 과정의 공정성을 요구한다. 또한 헌법 제27조와 제103조는 공정한 재판과 사법부의 독립을 민주국가의 핵심 조건으로 규정한다.
입법권이 재판의 구조나 환경에 반복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확산될수록, 사법부의 실제 독립 여부와 무관하게 국민의 신뢰는 훼손될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소는 사법권 독립과 관련해, 입법·행정 권력이 재판 과정이나 구조에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 왔다. 이는 특정 권력 주체를 겨냥한 경고가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를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사법의 독립은 법관을 보호하기 위한 특권이 아니라, 시민이 정치로부터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 변화들이 개별적으로는 합법의 외형을 갖추고 있음에도, 누적될 경우 ‘예외의 정상화’라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특정 상황을 고려한 조치가 반복되면, 그것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새로운 규칙이 된다.
이 과정에서 법의 정신은 흐려지고, 제도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종속될 위험에 놓인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작동하지만, 법치는 다수의 자제를 전제로 한다.
다수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는 순간,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제어할 능력을 상실한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가 붕괴된 사례들은 대부분 폭력이나 쿠데타가 아니라, 합법적 절차의 남용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한국 정치가 직면한 과제는 개혁과 법치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이다. 제도는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을 가진 자일수록 법 앞에 서는 조건은 더 엄격해야 한다는 원칙이 지켜질 때, 민주주의는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
합법의 형식이 정의를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법의 문자 이전에 법의 정신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절차만 남은 껍데기로 전락한다.
제도화된 예외가 정의로 오인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 그것이 오늘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불법의 합법화’가 아니라, 더 위험한 ‘불법의 제도화’다. 법을 바꾸는 힘은 있지만, 법 앞에 설 용기는 없는 정치 그 끝에서 무너지는 것은 정적이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다.
헌법은 권력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그 헌법을 권력의 방패로 사용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이름만 남은 껍데기가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명분이 아니라, 권력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의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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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완/코리안리서치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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