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병오년(丙午年) 새해가 밝았다. 붉은 말의 해라 불의 기운과 말의 속도가 추진력과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듯하다. 한 해의 시작은 언제나 경건하다. 새로운 계획도 세워보지만, 특별할 것 없이 하루하루를 잘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흔히 중년이라 하면 60~70대를 떠올린다.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의 나이, 귀가 순해져 남의 말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시기다. 또 하고 싶은 대로 하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종심(從心)의 나이는, 스스로에게 책임을 가져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아졌다고 느껴지는 요즘,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이 떠오른다. 평생 ‘위대한 집사’라는 품위와 신념을 지켜온 그는, 절제 속에서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만, 끝내 선택하지 않은 채 살아온 영국 집사 스티븐스의 이야기다.
그에게 삶이란 주인을 위한 완벽한 봉사였고 절제와 품위는 그의 존재 이유이자 가장 큰 자부심이었다.
습관이 되어버린 삶의 태도, ‘지금은 아니다’라는 자기 유예는 결국 아버지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채, 오로지 주어진 집사의 일에만 충실하며 단 하나의 방향으로만 살게했다.
기대를 품고 떠난 여행길에서 돌아보는 자신의 삶은, 너무 늦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담담하지만 씁쓸하다.
감정을 고백할 수 있는 순간도, 질문할 수 있는 기회도, 다른 삶을 선택할 여지도 분명히 있었지만 스티븐스은 그러지 못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이란,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중요했음을 알게 된다.
노년의 후회란 시간의 부족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속에서 뒤늦게 자각하게 되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남아 있는 나날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그것만이 주어진 질문이었지만 결국 그는 “살아온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며 남은 나날을 그렇게 정리한다.
우리의 지나간 시간도 돌아보면, 바쁘고 버거운 나날을 충실히 살아내는 데에만 집중했을 뿐, 자신을 아끼고 위하며 살아왔던 것 같지는 않다.
나역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현실은 필수만 강요된 삶으로 선택을 못했던 시간이었다. 결국 원하던 일을 이루지 못한 채, 살아온 대로 돌아가 새 주인을 위해 농담을 배워야겠다는 스티븐스 집사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남아 있는 나날』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뒤로 미뤄온 한 집사의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대개 중요한 선택 앞에서 “조금만 더 지나면, 지금은 때가 아니다,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고 말한다.
새해가 밝았다.
우리의 시간을 돌아보면, 오늘은 남은 날 중 가장 빠른 날이기도 하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진짜 늦어진다.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의 시간을 바꾸고, 행동하는 그 순간이 곧 전환점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평범한 나날 속에서 남은 날들이 편안한 시간으로 이어져,
중년을 혹은 노후를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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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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