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리콘밸리 K자 양극화 심화 속
▶ 캘리포니아주, 세수 확보 나서
▶ 순자산 10억불 부호에 5% 재산세
▶ 구글 창업자·백악관 AI 차르 등
▶ 테크 거물들 “자산 몰수세” 반발
▶ 법인 주소 이전 등 주 이탈 나서
▶ 11월 주민투표서 통과되더라도
▶ 기업 이전·소송 등 실효성엔 의문
▶ 엔비디아는 “실리콘밸리 지킨다”
▶ 비용보다 ‘인재 확보’ 우선 전략21일 오전 미 캘리포니아주(州) 팰로앨토 해밀턴 100번가. ‘혁신의 성지’라 불리는 실리콘밸리의 심장부지만, 이곳에 위치한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 기업 팔란티어의 캠퍼스 주변은 한산했다. 조용한 거리와 대조적으로 보안은 삼엄했다. 3명의 보안요원은 잰걸음으로 건물을 돌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건물 입구에서 촬영 중인 기자에게 다가와 “질문은 이 쪽으로 보내라”며 홍보팀 연락처를 건네고는 입구에서 밀어냈다.
2020년 본사를 콜로라도주 덴버로 옮기며 엑소더스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이 회사는 최근 팰로앨토에 남겨둔 일부 거점마저 완전히 철수하겠다며 강수를 뒀다. 주 정부가 추진 중인 ‘억만장자 부유세(부유세)’가 방아쇠를 당겼다.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벤처 캐피털리스트이자 이 회사 회장인 피터 틸은 최근 이른바 ‘부유세’ 저지 활동을 준비 중인 로비 단체 ‘캘리포니아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 300만 달러(약 44억 원)를 기부하며 행동에 나섰다. 기부금의 목적은 명시되지 않았으나, 업계는 이를 주 정부가 억만장자를 대상으로 추진 중인 부유세 저지를 위한 로비 자금으로 보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해당 단체는 이 세금을 막기 위해 총 7,500만 달러(약 1,100억 원) 이상의 자금을 쏟아부을 전망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혁신의 실험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을 거둔 거물들이 정든 빅테크의 고향을 떠나고 있다. 성공적인 엑시트를 앞둔 스타트업이나 기술기업들이 절세를 위해 실리콘밸리를 떠나 새 둥지를 찾는 건 흔한 일이지만, 지난해 12월 31일을 기점으로 두드러진 이번 이탈은 분위기부터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차르’로 불리는 데이비드 색스는 부유세를 ‘자산 몰수세’라고 맹비난하며 자신이 운영하는 벤처캐피털(VC) 크래프트 벤처스 사무실을 텍사스 오스틴으로 옮겼다. 구글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도 지난달 각각 마이애미 저택 매입과 법인 주소지 이전을 서둘렀다. 미국 방산 스타트업 앤듀릴의 창업자 팔머 러키는 부유세 도입 시 캘리포니아 내 모든 시설을 폐쇄하고 텍사스나 플로리다로 옮기겠다고 공언했고, 본사 이전을 진행 중인 민간 우주 기업 스페이스X와 AI 데이터 플랫폼 선두주자 스케일 AI의 탈출도 가속화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 등에서는 ‘부유세 엑소더스’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이미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마친 기업들의 ‘이별 통보’가 줄을 잇고 있다. 부유세가 이달 1일 기준 거주자에게 소급 적용되는 까닭이다.
캘리포니아주가 추진하는 부유세는 순자산 10억 달러(약 1조4,700억 원) 이상의 초부유층을 대상으로 5%의 일회성 재산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사업체 지분은 물론 주식, 예술품, 수집품, 심지어 지식재산권까지 과세 대상에 포함된다. 거주 목적의 부동산과 일부 퇴직 계좌는 제외된다. 주 정부는 이렇게 확보한 세수의 90%를 의료 서비스에, 나머지 10%를 식량 및 교육 프로그램에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캘리포니아주가 세수 확보를 위해 테크산업을 겨냥한 건 ‘혁신의 결실’이 극소수에게 집중된 채 정작 지역 주민들의 삶과 간극을 키우고 있다는 진단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상업·교육재단(CFCE)에 따르면 주 정부 전체 세수의 약 30%가 이들 기술 산업에서 발생하며, 상위 1% 고소득자가 주 개인소득세의 절반 가까이를 책임지는 구조다. 그러나 테크 산업이 막대한 세수를 책임지며 주 재정을 지탱하는 사이, 이들이 쏟아낸 천문학적인 자금은 지역 물가와 부동산 가격을 통제 불능 수준으로 밀어올렸다.
‘혁신의 수도’라는 명성의 대가로 서민들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삶의 터전 밖으로 밀려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새너제이주립대(SJSU) 인권연구소의 ‘2025 실리콘밸리 고통 지수(Pain Index)’ 역시 이 지역의 K자형 양극화가 ‘위기’ 수준임을 경고한다. 미국에서 생활비가 가장 비싼 이 도시에서는 전체 가구의 약 30%가 정부나 자선단체의 도움 없이는 식비와 주거비 등 기본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비자립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리콘밸리 양극화의 구조적 모순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비영리 민관 협력 기구인 ‘조인트 벤처 실리콘밸리’가 공개한 ‘2025 실리콘밸리 지수’에 따르면, 이 지역의 상위 0.1%에 해당하는 단 9가구가 보유한 유동 자산은 약 1,100억 달러(약 160조 원)에 달한다. 이는 실리콘밸리 하위 50%인 약 44만 가구의 전체 자산을 합친 것보다 12배나 많은 수치다.
실제 이 도시에서 만나는 이들의 상당수는 ‘살인적인 물가’에 혀를 내두른다. 지난해 11월 실리콘밸리 인재 유치 행사에서 만난 한 초년생 AI 연구원은 어렵사리 성취한 경력을 뒤로한 채 한국행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고연봉을 받아도 한국보다 3배 비싼 임대료와 4배 높은 식비를 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이 없다”며 “자부심만으로 버티기엔 삶의 질이 오히려 낮다”고 토로했다.
정책의 실효성을 둘러싼 찬반 공방은 격렬하다. 주 입법분석국(LAO)은 부유세가 불평등 해소와 사회 안전망 강화에 기여할 것으로 낙관한다. 지난달 11일 발의된 이 법안을 보면 LAO는 부유세 부과 대상인 수백 명의 초부유층이 캘리포니아 기술 기업의 임원과 투자자로 활동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책적 당위를 부여했다. 다만 “억만장자들이 절세를 위해 취할 선제적 조치를 가늠하기 어렵고, 세수 기반인 주가 변동성이 크다”며 재정적 영향에 대해선 불확실한 전망을 내놨다.
테크업계의 반발은 거세다. 레딧 공동 창업자이자 벤처 투자자인 알렉시스 오하니안은 부유세 부과 기준일을 나흘 앞둔 지난달 28일 X를 통해 “부의 격차를 해소할 방법은 찾아야 하지만, 미실현 이익에 세금을 매기는 것은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다”고 일축했다. 민주당의 주요 후원자로 손꼽히는 링크드인 공동창업자인 리드 호프먼 역시 “설계부터 엉성한 이 법안이 혁신가들을 캘리포니아 밖으로 내쫓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민주당 소속인 개빈 뉴섬 주지사마저 대권을 의식해 법안 저지에 사활을 걸고 있는 가운데, 실리콘밸리 거물들은 ‘캘리포니아를 구하라’라는 비밀 채팅방을 만들어 집단 대응에 나선 상태다.
현장의 분위기는 더욱 차갑다. 투자자들과 스타트업 대표들의 만남이 활발히 이뤄지는 팰로앨토 카페와 식당에선 부유세를 주제로 한 대화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날 국내 스타트업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IBK기업은행 실리콘밸리 창공 사무실에서 만난 한 펀드운용사(GP) 관계자는 “어제 대화 주제도 부유세였는데 업계에선 ‘이게 정말 실현 가능하겠냐’는 의구심이 지배적”이라며 “주가가 폭락해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면 이미 낸 세금을 돌려주기라도 할 거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함께 있던 한 펀드운용사(GP)도 “이번 타깃은 억만장자지만, 다음은 중산층이 될 것이라는 공포가 크다”며 “설령 주민투표를 통과하더라도 실효성은 제로에 수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000만 달러(약 150억 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실리콘밸리 갑부들의 자산을 7년간 관리해온 자산운용 전문가 대니얼 유가 2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의 한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실리콘밸리=박지연 특파원
미국 최대 증권사 찰스 슈왑에서 약 8억 달러(약 1조1,700억 원) 규모의 고객 자산을 운용해 온 대니얼 유 금융 자문가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억만장자들의 속내를 가감 없이 전했다. “주를 떠나거나, 로펌을 통째로 고용해 법적 소송을 하거나 할 것”이라며 “부유세 부과 대상으로 남을 만큼 바보라면, 억만장자가 되지도 못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모두가 탈출 대열에 서는 것은 아니다.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 엔비디아는 샌타클래라를 굳건히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우리가 실리콘밸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이곳에 세계 최고의 우수한 인재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징벌적 세금이라는 ‘비용’보다 인재 확보라는 ‘본질적 가치’가 더 크다는 계산이다. 이 거대한 세금 실험의 결과는 11월 3일 주민투표에서 판가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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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박지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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