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없는 존재이다.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환경을 공유하기 때문에 같은 문화속에서 산다. 사람은 개체이기 때문에 개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개성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똑같은 한국사람이지만 몇백년 전 이조시대에 산 사람들은 지금으로서는 넌센스에 불과한 가치관에 목숨까지 걸고 살았다. 남북이 분단될 때 38선 이남에 살게된 사람들은 남한식 사람이 되었고 이북에 살게 된 사람은 북한식 사람이 되었다. 서로가 적대하는 정반대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가정에서 함께 자라난 자매들이라고 하더라도 환경이 다른 집으로 각각 시집을 가면 생활 패턴이 서로 달라지고 결국에는 사고방식까지 큰 차이가 생기고 만다.
해외에 살고 있는 한인동포들 사이에도 이런 차이가 나타난다. 미국에 살고 있는 재미한인,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 중국의 조선족, 구소련 지역의 고려인은 모두 각각 다른 문화환경에 동화하는 동안 절반은 한인이고 절반은 거주국인인 특색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이민역사가 길고 사회 상층부에 들어가 있는 사람일수록 한인보다는 거주국인의 특색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처음에는 아주 한국적인 한인동포가 세대가 흐른 후에는 거주국인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남북한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개최된 후 남북관계의 변화에 대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주변 4대강국이 자국의 입지 강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한다.
미국과 일본은 대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빠른 행보를 하고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과 우호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는 한편 남한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하려고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남북한은 자주통일이라는 원칙 아래 4대 강국과 균형 외교를 펼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구도에서 볼 때 지금까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컸던 미국이 기득권을 잃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남한에 미군을 주둔하고 있는 동맹국으로 거의 절대적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북한으로부터는 남한을 대신한 협상 파트너로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앞으로 남북한이 직접 거래를 할 경우 미국의 존재가치는 크게 약화될 것이다. 더구나 남북한이 주한미군의 존립에 대한 입장을 바꿀 경우 다른 강대국에 비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한미관계의 변화는 결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재미 한인들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재미한인들에게 한국은 「내가 태어난 나라」이지만 미국은 「내가 선택한 나라」이다. 태어난 나라가 중요한지, 선택한 나라가 중요한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민 1세가 지나고 2세 때가 되면 재미한인들에게 한국은 [조상의 나라]일 뿐 미국이 [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미국이 소외된다는 것은 한국과 재미한인의 관계가 소원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미국과 한국이 전쟁을 하게 된다면 우리의 후손인 재미한인들은 미국군인으로서 한국에 총부리를 겨누게 될 것이다. 세계 2차대전 때 독일계 미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총부리를 겨눈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주독립이 좋겠지만 재미한인의 입장에서는 한미우호가 더욱 중요해진다.
남북관계의 개선 움직임과 함께 진보성향의 식자들 가운데는 미국의 영향력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이 적극 나오고 있다. 그러나 재미한인이 엄연한 미국인인 이상 재미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반미 주장은 반교포적 주장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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