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의 날짜가 발표된 후로 부모님과 헤어진 지 50년이라는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간 지금, 다시 한 번 부모님 생각이 떠올라 지난 6월 11일자 뉴욕포스트지의 지상을 통해 지난 일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 때, 내가 6.25 당시 이북에서 군대에 가는 것을 피해 콩밭속에 호를 파고 숨어있을 때 밥을 날라다 주시던 어머님이 나중에는 나를 군대에 보내지 않고 숨겼다고 어머님이 붙잡혀 가서도 끝내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님의 석방을 위해 자수하여 군대에 끌려가게 됐으며 떠나는 날 우시면서 나의 오른쪽 넙적다리에 독초를 붙여서 상처를 만들어 주셔서 평양에서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셨기에 지금까지 나의 제 2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 1950년 12월 5일 남포에서 작은 낚시배로 대동강을 건너서 후퇴할 때도 일주일만 있다가 오라고 하시면서도 혹시나 하셨는지 고이 간직했던 명주 2필을 내 배낭에 넣어주셔서 그것으로 서울 올 때까지 쌀과 바꾸어서 다른 일행들까지 무사히 오도록 하여 주신 고마우신 어머님 생각이 절절하다.
아버님은 시골에서 일정 말에 남포제련소에서 뿜는 연기의 독이 주위 6개 면의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입증키 위해 콩잎에 까맣게 흑점이 생긴 것을 직접 들고 가셔서 담판하고 연독 손해배상금을 받아 6개 면의 농민에게 분배해 주셨던 일.
또 우리 동네 앞 평야는 가뭄이 오면 물이 모자라 농사를 짓지 못하나 뒷쪽의 평야는 평년에도 물이 남아 버리면서 농사짓는 것을 보신 아버님은 사비로 10리길의 수로를 뚫어 연 3년을 3개 면 농민에게 농사 짓게 만들어주셔서 해방 후 토지개혁도 우리 토지는 빼앗겼지만 지주로 숙청은 면하여 1.4후퇴까지 부모님과 같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버님이 평소 보람있는 일을 하신 결과였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 새삼 간절하며 지금은 부모님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영영 볼 수 없고 남북 화해로서 부모님의 묘소에 찾아가 꽃 한송이로서 불효자식의 변명으로 대하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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