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초기 내가 미국남자들에게서 받은 가장 선명한 인상은 “아이들과 참 잘 노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우리 딸이 두세살될 때였는데 남편은 딸이 노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볼뿐 같이 놀줄을 몰랐다. 그런데 미국인 친구 버트는 당시 미혼으로 자녀를 키워본 적도 없는데 우리 딸과 재미있게도 잘 놀았다.
버트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 키우며 어린이 야구팀, 축구팀, 보이스카웃, 걸스카웃… 모임에 따라다녀 보면 “성인 남자가 저렇게 사근사근할 수 있구나”싶게 미국 아빠들은 아이들과 쉽게 친구가 되었다. 그 곁에서 한인 아빠들은 왠지 어색하고, 마음은 그게 아닐텐데, 물위의 기름 같은 모습을 자주 보였다.
무엇이 미국 아빠와 한인 아빠 사이에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낼까. 언어장벽, 문화적 차이도 요인이 되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그들의 ‘아버지’라고 생각된다. 성장기에 각각 보고 겪은 아버지가 오늘의 미국 아빠를 만들고 한인 아빠를 만들어 냈다고 할수 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옛친구가 가족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어린 존이 손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도 아빠세요?”‘그렇다’고 하니 존은 기뻐하며 “그럼 나를 공중에 던지며 같이 놀아요”라고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소년에게 아빠는 ‘같이 놀아주는 사람’이었다.
반면 우리 세대 남성들이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는 느낌은 어떤 거리감이다. 신문사의 남자 동료나 남자 대학동창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 한 후배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와 내가 같이 있으면 아들이 ‘싸웠느냐’고 물어요. 할말도 없고 해서 우두커니 마주 앉아 있으니 싸운 사람들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 서먹서먹해요. 자라면서 아버지와 오순도순 얘기 나눈 경험이 없으니까요”
전통적 가정에서 ‘아버지’는 피부로 닿는 존재가 아니었다. 엄하고 말이 없는 아버지가 귀가하면 아이들은 떠들다가도 입을 다물며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일반 가정의 모습이었다.
그런 권위적‘아버지’만 보고 자란 아들들이 시대가 변해 민주적인 ‘아빠’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민온 탓에 미국식 ‘DAD’까지 되어야 하니 의식과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아내들이 보기에는 가끔 남편들이 안쓰럽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40대 초반 주부의 말이다.
“내가 책을 읽어주거나 하며 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남편도 끼고 싶어해요. 그런데 어떻게 할지를 모르는 거예요. 괜히 집적거리며 장난을 거니까 아이들은 귀찮다며 싫어하지요”
‘아이들의 세계로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많은 아빠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려움이다. 그 세계로 들어가서 ‘친구 같은 아빠’가 되는 것이 현대 아빠들의 지향점인데 그렇다면 먼저 ‘친구’가 되는 법부터 배워야 하겠다.
친구가 되려면 우선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엄마들이 아이들과 쉽게 친구가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다음, 친구가 되려면 대화가 자유로워야 한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 위압감을 느끼고 마음 속 말을 제대로 못한다면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 ‘아버지’에게서 배워 은연중에 몸에 밴 권위의식을 아빠들은 내려놓아야 하겠다. 친구관계가 지속되려면 또 같이 즐기는 놀이가 필요하다.
3년전 한국에서 흥미로운 책이 소개되었다. 40세의 아버지와 12살의 아들이 같이 펴낸 고궁답사기였다. 부자가 서울의 4대궁을 구석구석 다니며 연구하고 사진찍은 기록들을 담은 책인데 경복궁에 놀러갔다가 아들이 이런 저런 질문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4년동안 함께 고궁을 찾으며 공부했는데 “공부라기 보다는 고궁에서 함께 즐기는 놀이였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이 부자가 얻은 것은 책 한권이 아니라고 본다. 같이 시간을 보내며 같은 놀이를 즐기는 과정에서 얻어진 ‘친구 같은 아빠’‘친구 같은 아들’이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아버지 날’이 있는 6월, 많은 아빠들이 아들이라는 혹은 딸이라는 소중한 친구들을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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