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세기동안 이어온 러시아문학은 깊은 인본주의 사상이 담겨 있는 세게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공감하는 사실이다. 러시아 문학은 푸쉬킨 사망이후 지적 주도권이 귀족층에서 인텔리겐챠층으로 넘어가며 볼쉐비키 혁명을 거치면서 오늘에까지 이어져 왔다. 러시아문학은 결국 인텔리겐챠의 산물인데 그 시대의 사회비판인 동시에 참담한 사회상과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었다.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와 같이 사랑에 입각한 문학에서 출발해 종교적 구원으로 들어간 작가이다. 무저항주의, 반전주의, 인도주의 작가인 그는 예술은 그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이르는 한 과정으로서 의의가 있다고 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이 맥락에서 의미를 찾아 볼수 있다.
그는 "인생의 의의는 선을 향한 노력이다. 선이 인생의 목적이며 사랑에 의해 선을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무저항주의나 무교회주의는 러시아 민중의 정신생활에 중심이 되었고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토마스 만은 "그의 죽음으로 유럽은 정신적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까지 했다.
톨스토이는 인간이 죽음에 처했을 때 오는 심리적, 종교적, 사상적 변화를 그의 소설속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보면 1880년대 지극히 평범하고 세속적인 이반 일리치가 병이 난다. 여러 의사들이 진찰했으나 아무도 시원하게 병명과 처방을 내리지 못하고 일리치는 결국 심한 고통을 거쳐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일리치는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것을 용납할수 없다. 괴로운 망아의 경지에서 절망의 병으로 고민했다. 자신의 무서운 고독을, 인간의 잔인함을, 신이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함을 한탄하며 울었다. 괴로움 끝에 그는 울음을 그치고 내부에서 생긴 신비한 흐름,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혼수상태에서 고통에 짓눌려 소리 지르고 있을 때 그의 손에 키스하며 슬픔에 젖어 울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그때 그는 아들의 순수함을 보고 광명을 발견했다. 그렇게도 냉혹하고 가식에 차있다고 미워했던 아내가 진정으로 슬피 울고 있는것도 이제야 보았다. 지나간 그의 생활이 무의미하고 잘못됐다는 것도 깨달았다. 모두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돼 비로소 빛을 찾을수 있었다.
하이데거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영감을 얻어 죽음과 존재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한다. 죽음을 대할 때 우리는 진정한 삶을 알게 되며 삶을 참으로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죽음은 다만 공포이다. 톨스토이는 사랑과 선을 통해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는 길을 보여 줌으로써 참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김인자(미주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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