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월드트레이드센터 자리에서 한 블럭 건너편에 세인트 폴 성당이 우뚝 서 있다.
빌딩 숲에 묻혀 왜소하게 보이던 이 성당이 새로이 부각되고 있는 것은 110층짜리 건물 두 동이 사라져 상대적으로 크게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236년 역사의 이 성당이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의 정신이 살아있고,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인트 폴 성당은 1766년 건축돼 ‘하느님의 전당’으로 봉헌된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1789년 조지 워싱턴 장군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뉴욕 연방청사에서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의원들과 함께 ‘신이 미국을 가호하기를’(God Bless America) 기원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지난해 9월11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 공격으로 미국 경제의 상징인 월드트레이드센터 두 동이 무너졌을 때 주변에 있던 10여동의 현대식 건물들이 무너지거나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지척에 있던 세인트 폴 성당은 조금도 상처를 받지 않았다. 유리창 한 장도 깨지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와 전쟁, 경기침체로 얼룩진 2001년을 보내고, 희망의 새해를 맞았다. 미국인들도 다른 어떤 해보다 2002년이 오길 기대한 것 같다. 좌절과 허탈, 분노와 공포가 교차되고, 경제가 단층처럼 가라앉던 한해를 보내며, 미국인들은 새해가 재기와 도전의 한해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 땅에서 삶을 꾸려 가는 한인 커뮤니티도 미국이 잘되고 경제가 풀리기를 바라며 새해를 맞는다.
미국은 올해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 첫째는 지난해 3월부터 시작된 경기침체를 극복하는 것이요, 둘째는 국제 테러집단의 보복을 극복하고 이를 소탕하는 것이다.
경제는 올 상반기에 바닥을 지나 하반기에 풀릴 것으로 전망된다. 테러로 상처받은 소비 심리가 살아나고, 기업들의 재고가 많이 소진되고 있다. 실업자 증가 속도도 크게 둔화되고, 저금리로 인해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 있다.
주식시장은 지난해 말 크게 상승, 투자자들이 자신감을 회복했으며, 올해도 상승세가 기대되고 있다. 부동산 시장도 여전히 호황이다.
문제는 기업의 과잉 설비와 투자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기 회복이 느리게 진행될 것이라는 점이다. 빠르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지만, 지난해처럼 가라앉지 않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테러와의 전쟁도 올해의 큰 과제다. 알 카에다 조직을 보호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은 붕괴됐지만, 그 수괴인 오사마 빈 라덴은 아직도 어디에 숨어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 세계 각지에 산재한 국제 테러조직이 언제 어디서 도전해 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지난 10년간 자만과 무방비의 상태에서 깨어나 테러와의 전쟁에 충분히 대응하고 있다.
테러 세력이 다시 조직되고 준동할 가능성이 있지만, 전 세계가 두 눈 부릅뜨고 경계하고 있는 한 그렇게 쉽게 문명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월드트레이드센터와 월스트릿 사이에 또 다른 성당이 있다. 그것은 트리니티 성당이다. 트리니티 성당과 세인트 폴 성당은 당시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지만, 현대식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서 구시대의 낡은 유물로 전락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세인트 폴 성당은 21세기 첫 전쟁의 기념비적 장소로 새롭게 각인되고, 트리니티 성당은 미국 금융 심장부가 다시 박동 치는 상징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지난해 말 8년 소임을 마친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성당이 전쟁의 폐허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은 뉴욕 시민과 미국인들의 강함과 재기를 웅변하는 메시지"라고 강조한 바 있다.
사상 초유의 재난을 당하면서도 건국정신이 살아 숨쉬는 ‘신의 제전’ 두 개가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이 새해에 어떤 어려움과 도전이 닥쳐오더라도 강인하게 일어설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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