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정열적인 스포츠다. 열기가 대단하다. 관객뿐만 아니라 선수들도 흥분한다. 99년 여자 월드컵대회에서 승부 킥을 성공시킨 미국팀의 브랜디 채스테인이 구장 한복판에서 웃통을 벗어 던지고 브라차림으로 두 손을 불끈 쥐며 열광하던 모습은 ‘타임’지 커버에까지 실렸었다.
94년 미국서 열린 월드컵대회 때는 자살골을 먹은 콜롬비아 선수가 고향에 돌아가자마자 팬에 의해 피살되었다. "너 때문에 콜롬비아가 졌고 콜롬비아가 지는 바람에 내가 돈을 잃었다"는 것이 살인의 동기다. 점잖은 영국인들마저 경기장에서 패싸움을 벌여 수십명의 사망자를 내는 것이 축구다.
오직 한나라. 미국만이 월드컵에 무관심하다. 미국에서 축구의 인기는 볼링 다음인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다. 그나마 미국 축구가 여기까지 온 것도 펠레 덕분이다. 브라질팀에서 은퇴한 펠레가 뉴욕의 코스모스팀으로 이적하면서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그는 94년 월드컵을 미국으로 유치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펠레가 브라질팀에 세번이나 월드컵 우승(58, 62, 70년)을 안겨준 수퍼스타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펠레의 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브라질 선수들의 이름은 기억하기 힘들다. 어머니 성까지 합쳐 이름을 지으니까 이름이 너무 길어져 중계할 때 아나운서들이 애를 먹는다. 펠레는 애칭이고 그의 이름은 에드선 아란테스도 나시미엔토다.
월드컵 TV중계는 세계 50억의 축구팬들이 지켜본다. 올림픽 경기는 수백 종목의 경기가 보름동안 진행되는 것이지만 월드컵은 축구경기 하나만으로 32개국이 5주 동안이나 펼치는 데도 열이 식을 줄 모른다. 이번 월드컵은 한·일 두 나라에서 하기 때문에 3주간 계속된다.
한국은 지금 전국이 월드컵 열기에 휩싸여 있다. 대통령 후보들도 축구에 무관심했다가는 표가 우수수 떨어질세라 앞다투어 응원석에 끼어 앉는다. 한국의 1차 목표는 16강 진출이다. 며칠 전 프랑스팀과의 평가전 전반전에서 한국이 2대1로 리드했을 때는 "이 팀 정말 프랑스팀 맞나" 할 정도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괄목할 만한 발전이라는 말이 꼭 어울린다.
한국 축구는 과거 너무 감정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 게임 시작하자마자 우리가 먼저 골을 넣어야지 한두 골을 먹는 날엔 당황해 팀웍이 깨졌었다. 리드하고 있을 때는 신바람이 나 잘하는데 지고 있을 때는 급속히 사기가 떨어져 맥을 못 추는 기질을 지닌 것이 한국팀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요즘의 한국 축구를 보니 확실히 달라진 것이 눈에 띈다. 골을 먹거나 리드 당하는 데도 침착하게 페이스를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신감이다.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가. 감독을 믿는 데서 나온다. 히딩크가 한국팀 감독을 맡고 나서 달라진 것은 공정함이다. 전에는 월드컵 선수 선발을 둘러싸고 항상 잡음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없다. 실력 위주로 인정사정 없이 선수를 선발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최고의 팀이라는 평을 듣는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히딩크 감독 자신이 별 욕을 다 먹으면서도 소신대로 밀어붙인 박력도 눈에 띈다. 고집에는 비전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사람 볼 줄 알고,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것 같다.
축구경기는 상대적이다. 내가 잘해도 워낙 센 팀에 걸리면 불운이고 내가 약해도 약팀과 붙으면 쉽게 16강에 진출하게 된다. 6월7일 삿포로에서 펼쳐지는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팀의 경기는 어느 한 팀의 눈물을 강요하는 경기가 될 것이다.
너무 16강에 집착하지 말자. 사실 ‘4강’이나 ‘8강’이면 몰라도 ‘16강’이라는 단어는 ‘강’자를 붙이기에는 좀 그렇다. 게임의 내용이 문제다. 한국팀의 플레이와 한국민의 응원이 세련되었느냐 못 되었느냐의 여부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은 주최국으로 세계에 무엇인가 보여주어야 할 숙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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