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일흔 다섯 용띠의 나의 큰형님께서 벌써 5개월 가까이 혼수상태에 계시다. 그의 인생 여정의 숱한 도전 중에 이번 병마와의 싸움은 아마 그의 마지막 도전이 될 것 같다. 아니 그는 이번에도 당당히 저승사자를 돌려보내고 그 힘들었던 이야기를 주위에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오형제 가운데 맏이로 형제중 제일 작은 몸체를 가지고 계시다. 그렇지만 집안에서 유일하게 우량아로 선발된 경력을 보유하고 계시다. 요즈음은 우량아 선발대회도 우두예방 접종처럼 고전어가 되어가지만 우리 형님에게는 멋진 인생학교 입학식이 된 셈이다.
교원으로 주로 강원도 산골을 전전하시던 아버지와 과감히 시부모를 떠나서 신혼 남편을 따르던 어머니 덕에 고아 아닌 고아생활이 그의 유년기였다. 그래도 읍내에서 가까운 고향마을 조부모님 밑에서 사촌들과 자란 생활이 그를 퍽 독립적이고 진취적으로 만들었다. 요즘 LA에 흔한 조기 유학생의 생활에 비교될 수 있겠다.
나는 지금까지 그가 누구와 주먹을 휘두르며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항상 그는 주위 친구들 사이에서 대장이었다고 들었다. 그의 창의력과 과감한 실천력이 그를 언제 어디에서나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다.
부모님과 떨어져 사신 우리 큰형님은 아버님이 선생님이셨지만 학교와는 별로 가깝지 않은 사이로 자랐다. 하지만 나름대로 화려한 삶을 교단에서 만드셨다. 그는 소위 한국 사회생활의 필수요건인 학연, 지연, 그리고 재력의 도움 없이 한국 선생님의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 표창을 세명의 각각 다른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부의 축척으로 평가되는 자본주의적 기준이 아닌 새 터전 확장이라는 개척자의 척도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삶을 사신 분이다. 그는 항상 논리적이면서 냉정하신 아버님에 맞서 동생들이 서울에서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밀어붙이셨다. 중학교 진학도 어렵던 시절 어린 동생들을 모두 소위 미국 명문대의 박사들로 크게 한 것이다.
그는 환갑이 지난 나이에 미국 이민을 왔다. 네명의 자식들에게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려고 또 앞장을 선 것이다. 키우다시피 한 동생들 보는 앞에서 빌딩청소며 스왑밋을 시작했다. 그는 우리 주위 모든 이민 1세가 겪었던 도전을 언제나 그랬듯이 부딪쳐 이겨 나아갔다.
이제 형님은 떠나실 것이고 많은 것이 함께 잊혀질 것이다. 나는 그를 우리 모두의 이민 1세로 기억하고 싶다. 결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밀리지 않고 당당히 부딪쳐 나아가는 개척자로서 말이다.
이진영<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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