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보다 보통 열 살 정도 어린 30대 중반의 친구들이 많다. 정신연령에 맞는 친구를 사귀다보니 그리 되었는데 그 중에는 심지어 열다섯살이나 어린, 옛날 같으면 딸이라 해도 좋을 친구도 두명이나 있다. 행인지 불행인지 이 친구들은 대부분 싱글이거나, 결혼했어도 아이가 없어서 모두들 시간 내기가 무척 자유로운 편이다. 맘만 먹으면 쉽게 영화를 보러 가고, 저녁도 나가 사먹고, 밤늦게 재즈 클럽에 가서 음악도 즐기고, 기분 내키면 누구네 모여 술도 마시고, 심지어 의기가 투합하면 며칠씩 함께 여행을 다녀오는 일들이 모두 가능한...
그런 친구들과 보조를 맞추어 놀기가 너무 힘든 나로서는 중간중간 맘 상하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가능하면 뛰쳐나가고 싶어하는 나와, 집안 어느 구석엔가 항상 잡아두고 싶어하는 남편과 아들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며 나의 스케줄을 꼼꼼히 점검하곤 한다.
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장을 한다든가, 캐주얼한 옷을 골라입고 분주히 왔다갔다하면 아들아이는 찰싹 달라붙어 “엄마 어디가”냐고 심문한다. 매일 정장차림으로 출퇴근하는 엄마가 튀는 색깔의 바지며 티셔츠를 입고 신이 난 듯 보이면 본능적으로 불안해하는 것이 지 아빠랑 똑같다.
둘은 내가 이런 차림으로 집을 나설 때면 언제나 문밖까지 따라나와 “빨리 와”라고 합창하는데 어려서부터 아빠가 가르친 말이다. 기왕 나가는거, “잘 놀다와” 하면 어디 덧나나.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내가 맨날 가정을 버리고 놀러 다니는 여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평소 너무 가정에 충실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친구들이 세그룹쯤 있는데 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이란 주로 좋은 식당에 가서 맛난 음식 먹고 수다떠는 일이다. 여자들에게 그 외에 달리 재미있을 일이 있겠나. 수년간 그런 모임들이 이어져 왔지만 한번도, 어느 누구도, 자신의 남편이나 남자친구를 합석시킨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내가 그 관례를 깼다.
그날은 올해 햇 와인이 처음 출시되어 와인애호가들이 모두 함께 맛을 보는 보졸레 누보의 날이었다. 친구들과 거의 1년전부터 이날 디너를 함께 하기로 약속해놓은 나는 바로 며칠전에야 남편에게 그 스케줄을 알렸다. 그런데 그 때부터 이것저것 트집 잡는 것이, 남편은 삐친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죄없는 애까지 잡는 모습을 보자 더 이상 혼자 놀러나가는 일에 위기감을 느낀 나는 친구들을 설득해 예약을 바꿔가며 남편과 아들을 데려가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리고 마음을 너그럽게 먹었던 탓인지 그 날의 디너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해마다 이날 3코스 디너에 2인당 보졸레 누보 1병씩이 포함된 스페셜 메뉴를 선보이는 프랑스 식당 ‘카페 보졸레’는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화려하지 않은 식당이지만 테이블보며 냅킨, 그릇이 정갈해서 기분 좋고, 프랑스 억양이 왕창 들어간 콧소리를 하는 웨이터들의 서비스가 흡족한 ‘카페 보졸레’는 벌써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천장에는 수백개의 오색풍선이 둥실둥실 떠있고, 빨간색 가발을 쓴 프랑스 여가수가 틈틈이 샹송을 부르며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동양인 테이블은 우리 하나, 어린 소년이라곤 우리 아들밖에 없었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애피타이저와 메인 디시, 디저트까지, 음식 맛이 훌륭한 것은 물론, 서브한 보졸레 누보도 과일향이 새콤쌉사름한 좋은 와인이었다. 숙성이 덜 된 레드와인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런 날 함께 마시는 와인은 맛보다는 분위기에 취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밤 11시가 넘어 돌아온 남편과 아들은 흥분했는지 자정까지 잠을 못 이루며 조잘대다가 한순간에 쓰러져 코를 곤다. 아이의 방에는 ‘카페 보졸레’에서 가져온 풍선들이 천장에 가득 둥실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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