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신문에 ‘보졸레 누보’라는 프랑스산 포도주의 수요가 한국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 KAL이 비행기를 증편까지 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3년 전 수요가 10톤이었던 것이 200톤으로 늘어났다니 20배가 증가한 셈이다.
지난 4월 서울에서 어떤 인사를 만났더니 술 마시는 습관을 위스키에서 포도주로 바꿨다며 “가을에 보졸레 누보를 10상자 샀는데 아직도 먹고 있다”면서 원하면 몇병 주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약간 놀랐다. ‘보졸레 누보’는 햇와인으로 생산된 지 석달 안에 먹어치워야 하는 포도주다.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을 기해 판매되는 것으로 “먹어 봤다”는 데 의미가 있지 그 이상은 아니다. 값도 싸 8달러 정도다. 남에게 선물하기에는 좀 뭣한 와인이다. 한국에서는 프랑스산인데 싸다 하여 한 사람이 몇 상자씩 사가는 모양이다.
요즘 서울에 가면 한국의 음주문화에 대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로라 하는 사람은 거의 포도주를 마신다. 거기다 최고급만 찾는다.
와인에서 최고급은 프랑스 버건디(부르고뉴) 지방에서 생산되는 ‘로마네 꽁띠’로 한 병에 4,000달러에서 1만달러까지 호가한다. 말만 들었지 미국에서 나도 이 와인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서울 H백화점 지하실에 가면 진열돼 있다는 소문을 듣고 4,000달러짜리 와인 관광에 나섰다. 그런데 미처 생각 못한 것은 나의 복장이었다. 티셔츠를 입고 갔는데 ‘로마네 꽁띠’를 보자고 했더니 열쇠가 잠겨 있다며 보여주지를 않는다. 다음날 넥타이를 매고 가 “좀 보자”고 했더니 그제야 꺼내 놓는다. 보통 와인하고 똑같이 생겼는데 별 것도 아니었다. “잘 팔리느냐”고 묻자 “없어서 못 판다”는 것이 세일즈맨의 대답이었다. 누가 4,000달러짜리 와인을 자기 돈 내고 사먹을까. 뇌물용으로 쓰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은 프랑스의 자존심이다. 그래서 정부에서 엄격하게 품질 관리를 하며 생산량을 제한한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 때 마차에 싣고 다니며 마셨다는 샴벨탕이라는 레드와인도 한 병에 1,000달러가 넘는데 1년에 500상자 밖에 생산 못하도록 프랑스 정부가 제한하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도 포도주 때문이었다. 명산지인 보르도 지방의 땅을 가진 엘레아노르 공작부인이 영국의 헨리 2세에게 시집가면서 지참금으로 이 땅을 영국에 바치게 되자 분노한 농민들이 들고일어났으며 이 전쟁에서 잔다크가 프랑스 역사를 바꾸어 놓는다.
위스키나 소주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이 취하는 것이지만 와인은 머리는 비교적 말짱한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이 취하는 특징이다. 돈환이나 카사노바가 여인들을 유혹할 때 와인을 적절히 이용했다는 에피소드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와인은 어느 지역에서 생산되었느냐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토질이 포도의 질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나파밸리라고 쓰여진 것과 캘리포니아 또는 센트럴 코스트라고 쓰여진 와인은 설령 같은 브랜드라 해도 전자는 비싸고 후자는 굉장히 싸다. 신기한 것은 좋은 포도는 비옥한 땅이 아니라 황폐한 땅에서 자란다는 사실이다. 모래, 자갈층, 석토질, 점토질이 섞인 땅에서 자란 포도라야 향기가 많고 비옥한 땅의 포도는 달기만 하지 향기가 없어 식용으로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와인은 분위기다. 분위기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와인을 마셔도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또 와인 잔이 아닌 맥주 잔이나 플래스틱 컵에 담아 마시면 와인은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 와인은 가슴으로 마시는 술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물론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와인 붐이 일고 있다. 위스키에서 약한 술인 와인으로 바뀌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와인문화를 제대로 이해 못한 채 무턱대고 고급화되는 사치바람이 불까 봐 걱정이다.
이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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