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바람이 몹시 불던 밤 나는 뒤뜰에서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소리에 잠을 깼다. 바람은 귀신 휘파람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바람은 왜 저처럼 광기를 띠고 날뛰고 있는 것일까. 신경을 세워 귀를 기울여 보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어둠 속을 조심스레 더듬고 창가에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일진광풍이 옆집 담을 뛰어넘어 좁은 뒤안길 모서리를 휘감고 돌아 뒤뜰로 빠져 나오면서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사정없이 내가 서있는 창문을 후려쳤다.
나는 바람 앞에 지극히 작아지고 그 위협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잔디 위로는 플래스틱 의자가 엎어져 있고 어둠을 넘어 구름 한점 없는 희뿌연 하늘에는 빛이 바랜 별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아침에 뜰에 나가보니 어린 복숭아와 감나무에 몇 잎 달려있던 잎들은 모두 날아가고 앙상한 회초리가지가 앙증맞게 보였다. 그러나 가지가 휘어지게 매달려 있던 오렌지는 용케도 한 알도 나무 아래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 억센 바람에 맞서 버티던 전봇대나 아름드리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넘어졌다는데 오렌지는 연약한 가지를 꼭 붙잡고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자연의 영감과 생존의 지혜를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며칠 전에는 한밤중 잠결에 창 밖에서 추적거리는 물소리에 눈을 떴다. 어디선가 듣던 귀에 익은 그 소리가 문득 어릴 적 우리 집 초가지붕 처마에서 떨어지던 빗물소리로 기억나 불현듯 그리움이 빈 가슴에 고여왔다.
이제 인생의 정상에 올라서서 나이가 주는 무력감과 소외감에 이따금 허망함을 느껴 오다가 소년기적 감상에 젖어 모정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순리를 벗어나 이국 땅에 묻혀 내 모국과는 영원히 단절되는 운명이 서글퍼졌다.
아내와 함께 가끔 걷는 길목에는 교회가 있고 울타리 가에는 두 그루 체리나무가 있다. 얼마 전 겨울,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단풍든 잎들이 무성하게 달려 있고 보도 위로는 낙엽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 몰골이 추하며 감동을 느끼지 못하다가 우연히 가지 끝에 피어 있는 자그마한 하얀 꽃들을 보았다. 엘니뇨 탓으로 제철을 잊어버리고 가을과 겨울과 봄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집 뒤뜰에 있는 감나무와 복숭아나무는 오래도록 잎이 움틀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제철을 기다려 잎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는 것이었다. 자연의 순리가 곧 삶의 대도라는 듯 말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인생도 순리 따라 분수를 지키고 슬기롭게 산다면 결코 후회함이 없이 고독과 허무함마저도 승화시킬 수 있다는 뉘우침이 회한이 되어 마음의 여백에다 되풀이 낙서를 하고 있다.
남진식/사이프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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