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아래 남동생이 다섯살 때였다. 연탄을 잔뜩 싣고 가던 수레가 두 다리를 뻗고 놀던 동생의 넓적다리 위로 지나갔다. 바지를 입은 듯 하반신 전체에 깁스를 한 동생이 천장에 다리를 매달고 입원해 있었다.
그때 엄마를 따라 신촌로터리에서 전차를 타고 서대문 로터리의 적십자 병원으로 가는 나들이가 기다려지곤 했었다. 불편한 동생을 보러 가는 것보단, 동생 병실의 미제 파인애플 통조림과 ‘정글북’이라는 그림책의 안부가 궁금해서였다.
어린 소견에 동생이 무척 호사하는 것으로 보여서, 죽지만 않는다면 저렇게 입원하는 것이 참 좋겠다고 바랐었다. 마.침.내.그.소.원.을.이.루.었.다.
참 이상하기도 하다. 몸의 어딘가가 아프기 시작하면 분명 환자가 되어야 함에도 나는 의사가 되어버린다. 아픈 나에게 진단과 처방을 척척 내리는 것이다.
열이 나면 타이레놀을, 속이 거북하면 정로환과 활명수를, 몸살엔 쌍화탕과 뜨거운 콩나물국… 이런 식이었다. 내 또래 아줌마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을 적용하면, 바쁜 의사를 귀찮게 않고도 내 선에서 얼마든지 끝낼 수가 있었다.
실은 의사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가 아니라 병원 가기를 겁낸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리라. 나는 병원 가기가 죽기보다도 싫다.
여학교 동창인 주치의가 들으면 섭섭할 소리일지 모르나, 그냥 밖에서 만나 수다를 떨라면 열 시간이라도 떨겠지만 의사의 오피스에 앉아 있으면 그만 기가 팍 죽는 것이다.
큰 병이 있다는 진단이 나올까봐 아픈 증세도 감해서 말하고, 의례적인 진찰이나 피검사라도 할라치면 울상이 되어서 “나 중병이니? 혹시 암이 아니니?” 하고 징징댄다.
병도 한참을 앓다가 혼자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야 의사를 찾으니, 의사 말로 잘 참는 환자는 ‘제일 나쁜 환자 그룹’에 속한다고 한다. 발병 초기에 와서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으면 약이나 주사 한방이면 끝날 일을 2~3주 병을 키워 가지고 오면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 격이 되어 입원까지 해야 하는 사태가 온단다.
거두절미, 이번에 내가 꼭 그랬다. 미련한 탓에 수술과 입원을 두번씩 해가며 화사한 봄날을 병원과 친하게 지냈다. 열이 아주 많이 올라 ‘사경을 헤매다’라는 문장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으니 글 쓰는 입장에서 보면 수확이라면 수확이겠다.
병원 퇴원 후에도 홈케어 간호사의 돌봄을 3주간이나 받았는데 팔자에 없는 공주노릇이 불편하기만 했다.
주부가 아프니 집안은 폭탄 맞은 바그다드와 같았다. 곳곳에 버리고 치워야 할 것이 쌓여 있다. 다 된 빨래를 거실에 산처럼 쌓아놓고 남편과 아들은 필요한 것만 골라 입고 신는다.
부엌과 냉장고엔 먹다 남은 음식들이 널려있고, 온갖 것이 뒤숭숭하고 신경을 건드리지만 생각하기도 귀찮아 그저 맥 놓고 쉬기만 하였다.
시간이 많으니 사다 놓고 읽지 못한 책이나 성경도 읽으면 좋으련만 그조차 하기 싫었다. 내 몸이 아프니 가족도, 친구도, 일도 모든 게 의미가 없었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것을 절감했다.
전쟁터뿐 아니라, 삶의 곳곳에도 지뢰와 복병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겁없이 살아왔다. 좋은 날이 있으면 궂은 날도 있는데 매일이 좋은 날인 듯 대비 않고 살았었다.
마구잡이로 조심 않고 먹어대던 동물적인? 식생활도,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며 몸을 혹사시키던 일들도 개선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매사에 절제하며 사는 지혜로운 삶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신경질만 늘어난 내게 변함 없이 사랑을 준 가족과 친구들 교우들, 의사 선생님께 감사하다.
그들의 기도와 위로, 꽃과 카드, 맛난 음식들…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사랑의 빚을 잔뜩 지고 말았다.
‘죽지 않을 정도만 아파 병원에 입원하고 싶다’던 어릴 적 소망은 크게 잘못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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