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치열했던 1951년 3월에 나는 한국 해병대 사관후보생 4기에 지원했다. 그리고 진해 해군 통제사령부가 있는 곳 왼쪽에 위치한 진해여자고등학교에서 훈련에 임하였다. 그때 후보생 중에는 해군 하사관 출신과 사회에서 입대한 후보생이 반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학졸업자 후보생 중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비롯하여 김일성 종합대학 공과대학을 다녔던 사람이 있었는데 경원하 그 사람이 김일성 대학 출신이었다.
그때 해병대는 스스로 사관후보생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없어 육군에 의탁교육을 받는 형편이어서 동래에 있는 육군 종합학교에서 편입생을 보내라는 연락이 오는 대로 수십명씩 보내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대기하고 있는 중에 30명 포병장교를 모집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래서 공대 출신을 비롯하여 여럿이 응시하였는데 그 중 경원하도 끼어 있었다. 시험은 주로 수학문제였는데 교관이 흑판에 시험문제를 출제했더니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경원하가 지적을 해서 교관이 당황하고 문제를 교정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이 사람이 보통 이상의 실력과 명철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 우리는 보병과 포병교육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중동부 전선에 배치됐다.
경원하 나는 그 사람의 성이 독특해서 기억을 한다. 그는 1.4후퇴 때 단신으로 월남한 사람이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과묵하며 사려가 깊고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교육 배경 탓이지 토론에 들어가면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후에 이민 갔다는 소식이 있었고 캐나다에서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남북회담이 열릴 때마다 경원하, 그 사람을 항상 생각해 봤다. 그는 숙청을 당하지 않았으면 고위직에 등용되었을 텐데 하고 항상 관심이 갔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북한 핵 개발의 중심 인물로 나타날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 어쨌든 반가운 소식이며 반가운 사람이다. 그는 두번, 젊었을 때와 노년기에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 가족이 염려된다.
김정희/레이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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